1.
프로축구 시즌이 시작되기 전엔
프로축구발전을 위한 공청회라는 것을 연다.
축구발전을 위해 의견을 모으자는 취지다.
1999년 무렵 시즌을 앞두고 공청회가 열렸는데
그 자리에 패널로 참석하게 되었다.
이용수 해설위원(현재 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의 주제 발표로 열린
이 자리에는 프로축구팀 관계자, 스포츠 신문 편집국장, 프로팀 감독,
그리고 일반 팬 대표 등 이미 선정된 5명의 패널이 참석했고
그 중에 팬 대표로 내가 참석했다.
각 패널이 질문할 때는 각 방송의 카메라들이 코앞에까지 다가와
촬영을 했다. 내가 말할 때도 그럴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다 되어 가는 데도 내 차례는 오지 않았다.
공청회가 끝날 무렵 사회를 보던 서기원 아나운서가 내게 물었다.
“일반인 대표로 참석하신 김은태님은 어떤 의견이 있으신지요...”
시간 다 지났고 이미 방송국 카메라들은 벌써 자리를 떴으며
방청석도 집에 가는 분위기인데 뭔 얘길 하라고?
억지로 되지도 않는 말 몇 마디 하다
분위기가 이미 파장 분위기라 그만 두었다.
공청회를 마치고 쓸쓸히 돌아가려는데
축구협회 관계자가 고생했다며 참가비 명목의 봉투를 건넨다.
얼마 안되지만 내가 한 수고에 비하면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이다.
오전이어서 공청회에 참석했던 동호회 식구들에게 점심도 못 사주고
급히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돈으로 금니를 했다.
2002년 월드컵 이후 프로축구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것도
그날 공청회에서 내가 깽판치지 않고 얌전히 집에 갔기 때문이다.
물론 금 이빨은 아직도 입 속에 잘 자리잡고 있다.
2.
1996년 아시안컵 대회에서
우리나라가 이란에게 6:2의 참패를 당했다.
그리고 얼마 뒤에 있었던 청소년 축구대회에서도
브라질에게 10:3이라는 참패를 당했다.
연이은 참패에 팬들은 분노했다.
마침 이런 팬들의 분노에 스포츠찌라시가 불을 질렀다.
청소년 팀이 브라질에 10:3으로 패하는 순간
축구협회 직원들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는 보도였다.
지금이라면 찌라시들의 수작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그때는 열이 좀 받았었다. 당시 PC 통신에서도 분노의 소리가 높았다.
급기야 PC 통신 스포츠 게시판에서
축구협회에 항의시위를 하러 가자는 글이 떠올랐다.
종로서적에서 오후 2시에 만나 축구협회(당시 안국동 근처)까지
가두 행진도 한다는 것이었다.
평일이었지만 만사 제쳐두고 참석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종로서적 앞에 모인 사람은 나까지 고작 6명이었다.
세상이 어찌 이런 일이....
‘그냥 헤어지자’파와 ‘그대로 강행하자’파로 나뉜 의견은
내가 총대를 멜테니 나를 따르라는 큰소리로 무마시키고
일단 축구협회까지 조용히 걸어가게 했다.
축구협회 근처 커피숍에서 당시 협회 부장(현재 프로연맹
핵심 간부)을 만났다. 그리고 내가 대표로 큰소리로 말했다.
“우리도 점잖게 항의하려고 합니다.
지금 종로에서 200명이 모였는데 우리가 대표로 온겁니다.”
그러자 같이 온 사람들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웃기까지 했다.
나의 뛰어난 전략은 이렇게 개망신으로 끝났다.
그 날 이후 나는 거짓말을 할 때 항상 단독범행을 한다.
3.
허정무 전 대표팀 감독과 함께 식사할 기회가 생겼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을 마치고 대표팀 감독을 사임한
허 감독과 대화를 갖자고 마련한 자리에 참석했다.
대표팀 감독은 사임했지만 잘잘못은 따져야 한다는 생각에서
많은 준비를 했다. 지나간 자료를 검색하고 기억을 더듬으며
예리한 질문을 준비했다.
잔뜩 벼르고 갔는데 허감독의 얘기중에 이런 말이 있었다.
아인트호벤에서의 선수시절 영원한 라이벌 팀인
아약스 암스테르담과의 경기중이었다.
축구의 포지션 상으로 경기 내내 맞장을 떠야 하는 선수가 있다.
그런 상황에서 허감독과 맞장을 뜨던 선수가 바로
나의 우상 요한 크루이프였다고 했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허감독은 1986년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의 축구 영웅 마라도나와 맞장 뜬 선수였다.
꼬리를 내리고 입을 한뼘이나 벌린 채 허감독의 선수시절 무용담에
귀기울이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섣불리 축구팀 감독을 흉보지 않는다.
4.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 한국의 진출이 확정되자
정몽준 축구협회장 주최로 만찬이 열렸다.
신라호텔 다이너스티룸에서 열린 이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는 당시 FIFA 회장인 아벨란제와
유럽축구협회장인 요한슨도 참석했다.
입장하는 순간부터 한복 곱게 차려입은 도우미가
양쪽 옆에서 에스코트하며 들어가는 커다란 행사였다.
만찬회중 나는 아벨란제 회장을 향해 말했다.
왜 아시아는 월드컵 티켓이 3.5장 밖에 안되느냐, 그에 비해
북중미 3장은 너무 많다. 그것이 내 항의의 주요 내용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벨란제 회장은 내 얘기를 듣기엔
너무 멀리 있었고 또한 한국말도 몰라 나의 이런 항의는
옆사람에게도 안들리는 혼잣말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멋적은 또 한번 혼잣말로 말했다.
“아벨란제...당신 오래 못가....”
얼마 뒤 FIFA 회장이 블레터로 바뀌었다는 보도를 접했다.
5.
처음으로 축구전용구장에 간 것은 포항전용구장이다.
너무 기분이 좋아 경기가 끝나고 살짝 운동장에 내려가 보았다.
잔디도 밟고 이것저것 구경하는데 경기를 마친 선수들이
짐을 챙겨서 하나둘씩 나오고 있었다.
낯익은 선수들이 내옆을 지나간다.
이상윤, 신태용, 이종화, 김이주.... 그러다 갑자기 반가운 얼굴이
나타나자 나는 손을 들어 그를 향했다.
사리체프.
일화(지금의 성남 일화)팀의 거미손 골키퍼 사리체프다.
지금은 한국인으로 귀화하여 이름도 ‘신의손’으로 바꾸고
불혹을 훨씬 넘긴 나이에도
안양 팀에서 현역으로 뛰고 있는 선수다.
내가 손을 들자 사리체프는 악수를 청하는줄 알고 내 손을 잡았다.
얼떨결에 악수했다.
생각해보니 이것이 내가 처음으로 악수한 축구선수다.
그리고 10년이 지나가는데도 아직 축구선수와 악수 한번 한 적 없다.
이 정도 축구장에 다녔으면 말 트고 지내는 축구 선수도
한 사람쯤은 있어야 할 것도 같은데 면식은커녕
사인 한 장 받은 적도 없다.
그동안 그렇게 축구를 보아 왔다.
붉은악마 태동을 전후에서 잠깐 활동했던 것 말고
내가 축구의 일선에서 무언가 한 것은 없다.
TV중계를 열심히 보고 경기장 한쪽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것이
축구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에서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화려한(?) 경력을 쌓을 수 있게 된 것은
그러한 축구에의 열정을 한번도 거르지 않고
오랜 시간동안 충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이 몇 가지 화려한 경험들은 그런 시간에서 저절로 생긴
계급장일 뿐이다.
내일도 나는 축구장 한구석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을 것이다.
누가 찾지 않아도 누가 부르지 않아도 그전에 그랬던 것처럼
내가 좋아하는 일에 충실할 것이다.
축구에는 그만한 매력이 있다.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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