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금부터 약 10년전 어느 여름 토요일.
동대문 운동장에서 열리는 프로축구를 보려고 집을 나섰다.
속옷보다는 약간 세련되었으나
결코 속옷과 큰 구분이 가지 않는 런닝 셔츠와
외출용이 아닌, 집에서 입고 자는 반바지에
샌들도 아닌 슬리퍼 차림.
지하철로 향하다 문득 포항에서 열리는 경기가 더 보고 싶어졌다.
행선지를 바꾸어 택시를 타고 김포공항에 도착.
포항행 비행기표를 샀다.
그리고 비행기에 탑승하려고 트랩에 오르는데
비행기 입구에서 다소곳이 인사를 하던 스튜어디스가
나를 훑어보더니 비행기표를 보자고 한다. 보여줬다.
이번엔 신분증을 보잔다.
신분증을 보여줬는데도 이상한 눈으로 나를 자꾸 쳐다봤다.
그날 이후 난 스튜어디스를 좋아하지 않는다.
2.
시간이 좀 더 흘러 포항에 축구를 보러갈 일이 또 생겼다.
그동안 혼자서 비행기로 다녔는데
그날은 모 프로축구단에서 준비해준 버스를 타고 갔다.
같이 간 일행과 포항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 서울로 오는 일정이었다.
가장의 권위와 가정의 평화를 생각해서 집에다 거래처인
무주리조트에 일하러 가서 하루 자고 와야 할 것이라고 했다.
가장이 품위 없이 축구보러 가서 놀다온다면
가장의 권위가 떨어진다.
그날 밤 포항앞바다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아내로부터 핸드폰이 왔다.
“여보, 지금 어디야?”
그리고 잠시 당황한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여기? 무주앞바다.”
무주는 우리나라에서 3면의 바다와 가장 멀리 떨어져있는 곳이다.
말의 실수를 깨닫고 매우 당황하고 있는데
수화기 너머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와.... 좋...겠...다....”
다음날 집에 도착한 나는 집에 있는 모든 지도를 없애버렸다.
3.
1997년 월드컵 예선전 일본전이 열리던 동경.
붉은악마의 창립멤버이자 일본 원정단의 핵심역할을 하던 나는
당시 현장에 있었다.
응원준비에 분주한 붉은악마 임원들과 경기전날밤
다음날 있을 응원에 대한 회의를 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응원가를 고르다 ‘아리랑’에 대한 의견이 나왔다.
“여긴 재일동포가 많아서 그 노래는 꼭 했으면 하는데
이런 식으로 4박자의 빠른 템포로 하면 어떨까요?”
제법 설득력이 있는 제안이었다.
얼른 그 제안을 수렴한 임원진은 몇번 연습을 하고
적당하다는 판단을 하기에 이르렀다.
마침 누군가가 또 제안을 했다.
“1절은 우리가 아는 아리랑으로 하고 2절은 뭔가 재일동포들께
전하는 메시지로 가사를 바꾸면 어떨까요?”
얼핏 좋은 제안 같았지만 나는 일축했다.
내일이 경기하는 날이고 겨우 65명 붉은악마가
2천명에서 5천명에 이르는 우리 응원단에게 가사를 알려주고
언제 외우게 하냐는 것이 내 의견이었다.
“그러면 그냥 아리랑 아리랑~ 1절만 반복하자구요?”
반문이 나오자 나는 또 한번 일축했다.
“2절 가사는 오~ 로 통일한다.
오오오오 오오오오~ 오오오오오오~ 다들 오케이?”
국민응원가 아리랑의 가사는 이렇게 완성되었다.
그러나 노래를 따라하던 전국민도,
CD에 노래를 담은 가수 윤도현도,
해외에서 축구중계를 보던 동포들도
국민응원가인 아리랑의 작사가가 나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다.
4.
2001년 제주도 서귀포 경기장의 개장경기에 갔었다.
오랜만에 제주도에 사는 친구를 만나 하루를 지내고
다음날 공항에 갔더니
전날 경기를 마친 대표선수들이 비행기를 타려고 대기하고 있다.
나와 같은 비행기다.
공항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뒤에서 어느 여자가
라이터가 안 켜지자 매우 신경질적으로 라이터를 흔들어댄다.
돌아보니 히딩크 감독 여자친구인 엘리자베스다.
담배불 필요하냐니까 고맙다며 내가 켜준 라이터에 불을 붙인다.
그리고 고장난 라이터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린다.
서귀포 경기장이 어떠냐 물으니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뷰리풀을 연발한다. 기분이 좋아진 것 같다.
만약에 누가 담뱃불 안붙여줘서 기분이 나빴으면
밤에 히딩크하고 싸웠을 지 모른다.
그러면 기분 상한 히딩크가
국가대표팀 훈련에 소홀히 했을 지도 모른다.
나의 작은 친절이 한국 축구를 구했다.
5.
그날 비행기를 타기 위해 이동하는 셔틀버스에
엘리자베스가 탔다.
한번 안면이 있다고 인사까지 하더니 내 옆의 빈자리에 앉는다.
잠시후 히딩크가 왔으나 빈자리가 없었다.
그 순간 협회직원인지 관계자인지 내 옆에 앉은 사람이 일어나더니
히딩크를 내 옆에 앉혔다.
한쪽엔 엘리자베스, 한쪽엔 히딩크 그리고 가운데에 끼인 나.
내가 앉아 있을 곳이 아닌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히딩크가 내 팔을 잡더니 ‘노 프라블럼’이란다.
그 표정은 남들 이목도 있으니 엘리자베스와 나란히 앉지 앉고
가운데 내가 끼어있는게 오히려 좋다는 의미 같았다.
기분은 좀 나빴지만 참았다.
사인을 받으려다가 나도 명색이 국가대표 유머작가인데
유머란에 글을 쓰는 사람들의 위상을 생각해서
히딩크 감독이 먼저 내게 사인을 해달랄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내릴 때까지 히딩크는 내게 사인을 해달라고 하지 않았다.
그래도 남의 이목이 있는데 둘이 나란히 앉아 가는 것보다
모양새가 좋았으니 내가 한국 축구에 큰 일을 한 셈이다.
대한민국의 월드컵 4강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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