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속에서 또 다른 여행을 떠나다

2003 베트남(호치민) 8화 - 에피소드

아하누가 2024. 6. 29. 22:04


 

여행을 하고 그 여행의 감상을 글로 정리하다보면

스토리의 구성으로는 부적당한 작은 해프닝들이 있다.

추억을 남겨주는 데에는 이런 작은 해프닝들이 오히려 더 오래 기억에 남곤 한다.

어느 여행에서든 작은 해프닝들이 생긴다.

여행을 즐겁게 해주는 것은 일정과 동행, 볼거리가 아니라 이런 작은 해프닝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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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군대

 

 

후이부(남. 26. 영어강사)와 여기저기를 함께 다니니 당연히 할 얘기도 많아진다.

어쩌다 군대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는데

베트남에서도 군대를 가는지라 녀석도 2년간의 군복무를 마쳤다 한다.

남자들이 모이면 군대 이야기를 하는 것은

비단 우리나라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고

세계 어디서든 통하는 공통의 주제라는 폭넓은 상식도 아울러 익혔다.

 

 

남자들이 쉴 새도 없이 수다를 떠는 유일한 소재인 군대.

그중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일, 가장 고생했던 일에 대한 얘기가 주류를 이룬다.

특히 이런 부분에서 서로 경쟁 심리가 유발되기라도 하면

전혀 근거 없는 허풍과 과장의 기세가 절정을 이뤄

대단한 무용담을 말하는 듯 분위기가 무르익는다.

이런 얘기들은 나이가 많을수록, 군대 생활을 조금 더 오래전에 했을수록

상당한 우위를 점할 수 있어

대부분 고참과 쫄다구의 관계로 그 고난의 순위가 결정된다.

 

 

 

후이부가 나보다 한참 어리지만 그들의 생활수준으로 볼 때

그의 군대 생활이 상대적으로 나보다 더 오래전에 한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군대 내의 복지 상황이 열악했다면 나보다 더 힘든 생활일 수도 있다.

잘난 것 없는 무용담이 한참 무르익으니

이야기의 주제는 서로 더 고생했다는 한국식 분위기로 바뀌었다.

그러나 녀석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내게 항복을 선언했다.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을 즈음 나는 후이부에게 넌지시 물었다.

 

 

 

“근데, 너 영하 20도에서 빤스만 입고 벌 받아 본 적 있어?”

 

 

 

 

 

2. 어떤 잉글리쉬 맨

 

 

구찌터널 여행길에 만난 잉글랜드 여행자 앨리. 24살의 젊은이답게 쾌활하다.

책에서 읽은 바로는 영국인들은 유머가 부족하여 무뚝뚝하며

아이들에게 자상하지 못한 아버지상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다 선입견이라는 것을 말해주듯

이 친구는 몹시 쾌활하고 유머가 넘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유럽에서부터 동으로 남으로 4개월째 여행 중이라는 앨리에게 물었다.

 

“그럼 지금까지 몇 나라 거쳐 온 거야?”

 

앨리는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어가며 자신이 지나온 나라를 말했다.

 

 

“루마니아, 터키, 시리아, 인도.....”

 

끝이 없을 것 같아 말을 끊고 물었다.

 

“가본 나라 중에 어느 나라가 제일 위험하든?”

 

 

앨리가 날 보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 명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잉글랜드!”

   

 

 

 

구찌터널 근처에 있는 어느 사격장.

훈련용 사격장이 아니라 관광객들을 위한 사격장인데,

다양한 종류의 총이 진열되어 있고 손님은 자신이 원하는 총으로 사격을 할 수 있다.

사진 왼쪽에 보이는 사람이 쾌활한 영국인 여행객 앨리.

 

 

 

 

3. 신데렐라

 

 

후이부와 투잇(여. 20. 대학생)과 함께 점심을 먹고 다음 일정을 잡고 있었다.

나는 후이부의 오토바이 뒤에 타기로 하고

아직 운전이 서툰 투잇은 뒤에 따라오기로 했다.

출발전 약속장소를 정하고 이를 확인하느라 저들끼리 많은 얘기가 오가던 중

오토바이 시동을 걸던 투잇의 신발이 땅에 떨어졌다.

그런데 이 둔감한 여대생 투잇은 신발 벗겨진 줄도 모르고

약속장소 확인에 정신이 없다.

발로 밀어 구석으로 살짝 숨겼다. 그런데도 맨발로 가려고 한다.

정말 그렇게 둔한 사람은 처음 봤다.

 

 

“헤이, 투잇. 신발 안 가져가?”

 

 

한쪽 구석에 밀어둔 신발을 가리키니 몹시 민망한 듯 얼른 신는다.

그 짧은 틈에 내가 말했다.

 

 

“지금 너 신데렐라인줄 착각하고 있지?”

 

 

후이부와 나는 매우 즐겁게, 큰 소리로 웃었다.

영어를 잘 못 알아듣는 투잇이 후이부에게 베트남말로 묻는다.

후이부는 그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손사레만 친다.

옆에 있던 내가 후이부에게 말했다.

 

 

“왜? 통역 좀 해주지?”

 

 

그러자 후이부 하는 말.

 

 

 

“내가 어떻게 통역해도 ‘신데렐라’는 설명하기 힘들어요.”

“......!”

 

 

 

 

 

베트남은 아직 미국의 영향을 덜 받은 곳이다.

아니, 어쩌면 미국의 강력한 영향 아래 자라고 또 살고 있는 우리가

더 불쌍한 건지도 모르겠다.

 

 

 

 

 

 

 

 

 

아하누가 

2003년 11월. 구찌터널 관광을 마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