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여행을 하며 예상치 못한 소득을 얻는 경우가 있다.
공돈이 생긴 것도 아니고 좋은 호텔에 저렴하게 숙박하는 것도 아니다.
여행자로서 쉽게 볼 수 없는 것들을 우연찮게 또는
운 좋게 마주치는 일들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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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필리핀 마닐라에 갔을 때
바클라란 시장 뒷골목에서 벌어지는 학생들의 농구시합을 본 적이 있다.
작은 골목길을 막아 양쪽에 골대를 세우고
유니폼을 갖춰 입은 선수들과 심판진, 그리고 나름대로 비장해 보이는 표정들.
고르지 못한 바닥과 환경 때문에 웃지 못 할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끝까지 신중하고 진지하게 경기에 임하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잠깐 작전타임 휘슬이라도 울리면
그 틈을 이용해 주변에 구경하던 시민들이 통행을 한다.
아마도 그 장면이 내가 필리핀을 방문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시간이 지나 세부에 갔을 때,
모알보알 해변으로 이동하던 중 알칸타라 ALKANTARA 라는 작은 도시에서 벌어지는
축제 현장을 발견한 적이 있다.
주변의 모든 학교는 물론 동네 사람들까지 모두 어울리는 커다란 규모의 축제였는데,
사진 찍는 것을 매우 좋아하는 내게 그런 기회는 로또에 맞은 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며칠간의 여행에서 찍을 수 있는 사진을 이 한나절에 모두 찍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런 일들은 여행을 하면서 자주 맞닥뜨릴 수 없는 현상이다.
그래서 그런 우연한 만남과 발견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일 게다.
* * *
처음 방문하는 베트남에서도 매우 훌륭한 추억 한 가지를 얻었다.
그 훌륭한 선물이 바로 1990년대 초반에 상영되었던 영화
<연인>의 배경이 되었던 ‘레홍퐁 하이스쿨’이다.
생각 없이 시내를 돌아다니다 문득 펼친 가이드북에 나왔던 그 학교.
갑자기 그곳을 가야겠다고 생각이 떠오른 건
아주 오래전에 전에 본 영화 장면 중에
유일하게 학교 앞 풍경만 기억에 남아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장 자크 아노 감독의 영화 <연인>은 1992년 한국에 개봉된 영화로 기억된다.
베트남이 프랑스 식민지였던 시절.
몰락한 프랑스 집안의 딸(제인마치)과 중국계 젊은 사업가(양가휘)의 이루어질 수 없는,
그러나 매우 뜨거운 사랑을 그린 영화다.
영화 장면 중에 양가휘가 하교하는 제인마치를 기다리고 있던 학교가 바로 이 학교.
레홍퐁 하이스쿨이다.
어찌하여 나는 그 많은 장면 중에 다른 것은 하나도 기억하지 않고
학교 앞에서 제인 마치를 기다리는 양가휘의 모습만 기억하고 있었을까.
학교를 찾아갔다. 생각보다 작은 학교다.
안으로 들어가면 모르겠는데 입구에서 보는 학교는 크지 않다.
안으로 들어가자니 정문 수위실의 수위가 인상을 쓰며 손을 내젓는다.
한국이나 베트남이나 학교 수위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
이리저리 입구 근처만 배회하고 사진을 찍는데 왠지 허전하다.
영화에서처럼은 아니더라도 베트남의 명물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전통복장, 아오자이 차림의 학생들이 이 문으로 쏟아져 나와야
나도 양가휘가 될 수 있고 또 사진도 제대로 된 그림이 나올 텐데...
다음날을 기약하고 돌아섰지만 결국 다른 일정 때문에 더 이상 방문하지 못했다.
이번 일정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과 아울러
가장 아쉬움이 남는 한 가지가 또한 이 부분이다.
* * *
새로운 곳을 방문한다는 여행은 어디를 가도 새롭고 신선하다.
다른 환경과 사고를 가지고 자란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여행엔 충분한 매력이 있다.
얼핏 보기엔 보잘 것 없는 학교 건물이겠지만 나는 이곳에서 커다란 만족을 느낀다.
어쩌면 이런 좋은 느낌을 얻기 위해 매일 어디론가 떠나는 꿈을 꾸는지 모르겠다.
아하누가
2003년 11월. 호치민시의 레홍퐁 하이스쿨에서.
제인 마치와 양가휘가 주연한 영화 <인연>의 배경이 된 레홍퐁 하이스쿨.
이 학교의 정문을 통해 하교하는 아오자이 차림의 여학생 행렬,
그리고 입구에서 제인 마치를 기다리는 양가휘가 서있던 장면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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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2년이 지난 2005년 어느 여름.
케이블 티비의 한 방송에서 이 영화 <연인>을 다시 보았다.
생각보다 훨씬 진한 애정표현이 나오는 영화였지만
그 장면이 매우 아름다운 영화였다.
그리고 나는 다시 레홍퐁 하이스쿨을 떠올렸다.
그러나 2005년 11월, 세번째 호치민 방문에 그곳을 들리지 못했다.
또 부질없을 지도 모르는 생각으로 다음엔 꼭 가보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 다음해인 2006년 4월, 5개월만에 다시 호치민을 찾았다.
이번엔 잊지 않고 레홍퐁 하이스쿨을 찾아갔다.
다행히 권위 넘치는 학교 수위가 인자하게(?) 입장을 허락해줬고,
처음으로 학교안을 들어가 이리저리 둘러볼 수 있었다.
아무 것도 특별한 것이 없는 그저 평범한 학교다.
영화 <연인>의 강렬함이 남아서인지 그래도 내게는 인상적인 장소다.
아마 이번에 또 호치민을 가도 이곳은 꼭 다시 찾을 것이다.
이곳에는 뭔지 모를 편안함과 신비로움이 있다.
촬영카메라 2003년 당시 NIKON Coolpix E-5700
2006년 PENTAX ist-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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