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가 즐기는 여행의 패턴하고는 너무나 다른 일정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첫 번째 방문에서의 몇 가지 실수는 다음 여행에 있어 중요한 지침서가 되었다.
첫 방문지인 베트남을 잘 훑어볼 수 있게 해준 계기가 되었다.
이 지루한 여행기도 나중에는 큰 도움이 되었다.
사이공에 도착하여 호텔을 잡고 짐을 푼뒤 가장 먼저한 일은
밥 먹는 일이었다.
외국에 나가니 밥 먹는 일도 대단한 일정인양 가이드북 여기저기를 뒤졌다.
자리에 함께 있던 후이부(Huy Vu. 26. 영어강사)가 물었다.
어디 가서 뭐 먹을래?
잠깐 기다려봐.
한국에서 뉴스나 신문만 봐도
베트남의 음식중에 쌀국수가 유명하다는 것은 저절로 알게 된다.
쌀국수라는 것은 말 그대로 쌀로 만든 국수를 만하는 것인데,
가끔 나이 40쯤 먹은 사람이 예전에 예비군 훈련에 가서
훈련장 매점 옆에 민간인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먹었던 쌀국수를
월남 쌀국수라고 우기는 일이 있다.
그런 얘기는 잘 모르는 사람들 앞에 가서 해야 한다.
그게 쌀국수는 맞지만 베트남 쌀국수인 퍼(Pho)는 아니다.
가이드북이나 인터넷 정보를 보니 쌀국수에 대한 평가가 대부분 좋다.
기억을더듬어보니 나도 예전에 베트남 쌀국수를 먹은 적이 있다.
미국 LA 근교에 있는 도시의 베트남 촌에서 먹었는데,
국수도 맛있고 얇은 쌀 전병으로 만들어 튀긴 만두같은 음식도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다.
오리지날은 아니었겠지만 나름대로 베트남 쌀국수를 맛본 경험이 있으니
당연히 첫 메뉴는 베트남 쌀국수로 할 수밖에.
외국인들에게 잘 알려진 두곳의 식당중 한곳을 정했다.
퍼호아(Pho Hoa) 라는 곳과 퍼 2000(Pho 2000)이란 곳이 유명했는데
퍼 2000으로 정했다.
단지 가깝다는 한가지 이유만으로.
데탐거리에서 걷기 시작하여 근처 공원을 지나 식당으로 향하는데
근처 공원 분위기가 눈에 확 띈다.
오토바이가 약 2미터 간격으로 줄서 있고 오토바이는 연인들이 타고 있으며,
모두 진한 애정 표현을 하고 있다.
첫대면하는 거리 분위기치곤 매우 쇼킹한 장면이다.
이곳은 공산주의의 영향이 남아 있어
아직 부부가 아니고는 숙박업소 출입이 제한되어 있다.
설령 법의 제약이 아닐 지 몰라도
이들에게 숙박업소 출입은 아직 어색한 사회 분위기다.
그래서 오토바이 위에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인데....
힐끔힐끔 쳐다보다 가만히 보니 고난도의 테크닉을 발휘하는 커플은 안보인다.
하긴, 여행 기간 내내 치마입은 사람을 본적이 없는 곳이다.
후이부와 투잇(Tuyet. 20. 학생),
투잇 이모(28. 심심해서 따라옴)와 함께 들어선 퍼2000.
유명하다기에 기대가 있었으나 그저 우리네와 같은 평범한 식당이다.
단지 전 미국 대통령이 들렀다고 해서 유명세를 치르는 곳인데,
벽면엔 클린턴 사진도 조그맣게 붙어 있다.
근데 정말 이 친구가 오긴 온 것 같은데 젓가락 들고 퍼를 잘 퍼 먹었을까?
클린턴이 이곳으로 올 때 경호상의 문제로 인해
공원 근처의 커플들을 다 쫓아냈을까?
갑자기 그것이 알고 싶어졌다.
주문한 쌀국수와 튀김 만두가 나왔다.
오래전 미국에서 먹은 그 맛을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런대로 맛있다.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알아본 정보에 따르면
이 맛있는 쌀국수에도 단점이 하나 있으니
그게 바로 이들이 좋아하는 향초가
우리에겐 먹기 힘든 맛을 낸다는 점이었다.
이곳은 여행자들이 자주 오는 곳이라 그 향초를 따로 빼서 그릇에 담아 두었다.
경험이라 생각하고 한 줄기를 꺼내 씹었다. 바로 입에서 욕이 나왔다.
앞에서 관심어린 시선으로 지켜보던 베트남 친구들 생각해서 하나 더 씹었다.
욕이 두배로 나왔다.
나름대로 극복하려 했지만 아직은 좀 무리다.
이후 그 향초는 몇번 더 나를 괴롭히게 된다.
그러나 훗날 한국에 돌아와 점심을 먹던 어느 순간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외국 사람들에게 깻잎을 그냥 씹으라 그러면 내가 그랬던 것처럼 욕 나올껄?
마늘에 고추장 잔뜩 묻혀 먹이면 니가 죽든 내가 죽든 한번 뜨자고 할 껄?
나중에 그렇게 생각하니 쉽게 이해할 수 있었고
또 그렇게 못견딜만한 음식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무튼 맛나게 먹었다. 친구들은 내가 먹는 것만 구경하고 있다.
적당히 자리를 마칠 즈음 서빙하는 아가씨를 불렀다.
헤이! 여기 계산서!
서빙하는 아가씨가 계산서를 가져왔다.
외국에서 밥 먹을 때마다 그랬듯 계산서에 적힌 돈을 주고
돈을 받아간 종업원이 잔돈을 거슬러 주면
적당한 금액을 팁이라는 명목으로 테이블에 올려둔다.
그 행동이 별로 익숙치 않았던지 앞에 앉은 친구들이 묻는다.
"한국에선 밥 먹고 그렇게 돈내니?"
".....?"
한국에서 식당에서 밥 먹은 횟수를 따져보면
대충 1만번은 될 것 같은데 단 한번도 그렇게 돈 낸 적은 없다.
외국이니 나도 대충 외국식으로 하려고 그랬을 뿐이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대답했다.
"아니, 그럴 리가 있나."
"그럼 어떻게 해?"
"어떻게 돈 내냐구?"
아줌마! 여기 얼마에요?
얼마다!
얼마라구요?
알았어요.
이 얘기와 함께 약간이 과장된 몸짓을 보이며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돈 꺼내는 시늉을 하니 모두 좋아라 웃는다.
별 것 아닌 이 장면은 나에게는 많은 의미가 있다.
잘 알지 못하는, 다른 환경과 관습에서 자라온 사람들이
마음을 터놓는 순간이다.
약간은 과장된 나의 말과 몸짓에서
그들은 - 외국인 대해본 경험이 많지 않은 - 뻔한 동질감을
매우 친근한 동질감으로 여기게 된다.
아마 그 자리에서 베트남 사람 보다 돈 좀 많다고,
조금 더 잘 사는 나라에서 왔다고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이질감을 보였다면
이후 여행길에서 나는 눈에 보이는 베트남만 둘러본 채 돌아왔을 것이다.
이후 친해진 친구들을 통해 나는 또 다른 베트남을 본다.
민감한 문제인 남북의 지역감정과 한류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각,
신데렐라가 누군지 모르는 그들만의 역사와 문화.....
밥 한끼 같이 먹는 일.
이것은 한국에서만 중요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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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한국에서 문득 베트남 쌀국수가 생각나 전문음식점을 찾았다.
쌀국수는 맞는데 뭔가 싱겁다. 뭐가 문제였을까?
그러다 나는 그 문제가 특유의 향초가 빠졌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요즘은 한국에서 베트남 쌀국수를 먹을 때 그 향초를 잔뜩 섞어 먹는다.
음식문화를 이해한다는 것, 그 나라를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시간이 많이 지나고 방문 횟수가 잦아지면서
나는 유명세가 있는 쌀국수 식당을 피해 실속있는 곳을 찾아다닌다.
경험이 가져다준 노하우다.
하지만 식당만 달라졌을 뿐 쌀국수는 베트남에서 빠질 수 없는 추억이니까.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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