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속에서 또 다른 여행을 떠나다

2003 베트남(호치민) 4화 - 롤렉스 시계

아하누가 2024. 6. 26. 01:00


 


사이공의 첫 아침.

시차와 잠자리 적응에 실패하여 6시경에 눈을 떴다.
베트남의 아침은 일찍 시작한다는데 그거야 더운 나라니까 그렇다.
대학교의 첫 수업이 6시 30분에 시작한다며

부지런한 나라라고 잘라 말하는데
부지런한 걸로 따지면 우리나라 당할 나라있나?
새벽 3시쯤 잠이 안와 담배라도 한대 피우려고 집앞 골목길에 서있자면
신문 배달, 우유 배달, 한경미화원 등 평소 몰랐던 사람들

모두가 부지런히 움직인다.
추우나 더우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똑같이 움직인다.
이런 장면을 베트남 사람들이 보면 쓰러질 것이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대충 호텔을 옮기고 나니

후이부(huy Vu. 26. 영어강사)가 찾아왔다.
대뜸 어디에 가고 싶냐고 묻는다.
첫 행선지는 근처에 있는 유명한 시장 벤탄 시장으로 잡았다.
어느 나라든 시장이란 곳은 그 나라의 생활과 분위기 등을 쉽게 알 수 있는 곳이다.

 

물론 그런 목적도 있었지만 일단 손목시계 하나가 필요했다.
한국에서 출발할 때 깜빡 잊었던 것인데 막상 현지에 도착하니
시간을 확인 못하는게 제일 답답하다.
한국에서야 가장 정확하고 편리한 '핸드폰 시계'가 있지만

여기서는 무용지물이다.

 

후이부의 오토바이 뒤에 타고 시장에 도착해서 시계 파는 곳을 찾았다.
나름대로 형식 갖춘 시장의 한 코너에 시계 판매점이 있다.
시계를 사겠다니 시계 가게 종업원이 대충 몇 가지를 꺼낸다.

 

이건 3만원,

이건 4만원....
헤이, 난 그게 필요한 게 아니구 대충 여기서 5일만 차면 되니까 더 싼거, 오케?

후이부가 통역하자 얼른 알아 들었다는 듯 다른 시계를 꺼낸다.

이건 얼마?

종업원의 대답은 한국돈 약 8000원.
헉!
가격에 놀란 것이 아니라 상표에 놀았다.

 

롤렉스(Rolex)다.
부티나는 시계의 대명사 롤렉스.
신분의 차이를 가장 간단하면서도 극명하게 표시할 수 있다는

바로 그 시계 롤렉스.
명품이란 단어가 사회적으로 중요하게 인식된 게기가 되었다는

그 브랜드 롤렉스.

 

그 롤렉스가 지금 내 앞에서 여성중앙 한권 값도 안되는 가격에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일단 웃음을 참았다. 그리고 꼼꼼이 보니 시계줄이 너무 무겁게 생겼다.
더운 나라에서 땀깨나 흘리게 생겼다.
다른 거 없냐고 물으니 새로운 걸 꺼내는데 또 롤렉스다.
이번엔 시계는 제법 폼나는데 시계줄은 까만색 가죽줄이다.

설마 정말 가죽이겠나.
이건 얼마?
한국돈 약 7000원이다.

웃음이 막 터져나올 것 같았지만 혀를 깨물고 참았다.
손목에 차니 제법 폼난다.
갑자기 인터넷에서 읽었던 정보 한가지가 떠올랐다.
무조건 깎으라는 정보. 여행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무조건 깎으라는 정보.
바로 그 정보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도 한 순간이지 7000원짜리 시계, 그것도 롤렉스라 웃음 참기도 힘든데
어찌 깎아달라는 말이 나오랴.
그러나 막상 그냥 사기도 뭔가 허전한 기분이라 웃음을 참으며 겨우 말문을 열었다.

 

 

"더 싼 건 없냐?"

 

 

종업원이 이번엔 6000원짜리라며 시계 하나를 더 내민다.
이런, 이번엔 오메가(Omega)다.
롤렉스와 버금가는 명품의 대명사 오메가.
사진으로만 봤지 오메가 마크가 생긴 시계를 보는 건 처음이다.
또 웃음이 나와 이번엔 허벅지를 꼬집었다.
그리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나 또는 내 친구들에게 나는 커다란 자랑거리 하나가 생겼다.
이 시간 이후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자랑을 할 것이다.

 

 

"혹시 롤렉스 살까? 오메가 살까? 고민해본 사람있어?"


 

롤렉스 시계 가죽끈 8000원짜리로 낙찰.
여행 내내 손목에 차고 다니고 한국에 와서도 친구들에게 자랑했다.
마누라는 자기 꺼 안사왔다고 삐졌다.
아마 아직도 8만원 주고 샀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이후 여행에서 돌아와 시간이 조금 지난 뒤

다른 여행동호회 모임에 간 적이 있다.
마침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자랑하려고 팔뚝을 쑥 내밀었다.
뭔가 쳐다보던 사람들이 각자 소매를 걷어 팔을 내민다.
다 롤렉스다.
이후 시간부터 누가 더 싸게 샀나를 마치 경쟁하듯 구입가격이 제시되었다.
3500원짜리까지 봤다.
이후 나는 롤렉스를 자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시계는 방안 화장대 위에 흉하게 놓여 있다.
아마 다음 여행때 요긴하게 쓰이겠지만 지금은 당장 할 일이 없을 것이다.

 


 * * *

 


베트남에는 저작권이라는 개념이 없다고 한다.
외국에서 아무리 명성을 날리던 브랜드라 해도

그 나라에서 같은 이름으로 먼저 등록해 버리면 그 이름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사회주의적 사고 방식도 있고

아직은 국제적인 정보와 추세에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설령 그것이 위법인 도용이라 해도

그들이 느끼는 위법 여부의 개념은 전혀 다를 것이다.
베트남에서 사업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유의해야 할 대목이다.

 

그 이유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행 기간 내내 맥도날드 햄버거를 못찾았다.
화장품 가게도 들렀지만 랑콤 화장품을 찾지 못했다.

물론 어딘가에 있긴 있겠지...

우리나라도 저작권으로 대표되는 지적소유권이란 개념이

사회적으로 인식된 것은 그리 얼마되지 않은 시점이다.
뿐만 아니라 상표권, 초상권 등 다양한 무형의 권리가
뉴스에 자주 등장한 것도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그렇듯 사회는 조금씩 조금씩 선진국 시스템을 갖춰 나간다.
제도의 합리적인 신설과 냉정한 적용 여부가
선진국과 후진국을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이다.
우리도 아직 멀었지만 베트남 또한 아직은 다듬어지지 않은 나라다.
하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이런 시스템에 금방 적응할 것이다.

이 나라는 그럴 능력이 있다.
베트남에서 나는 그것을 본다.


짝퉁 시계 하나 사면서 참 많은 걸 느낀다.

 

 

 

 

 

 

 

벤탄시장의 외관과 시장 안의 한 상점.

벤탄시장은 호치민에서도 대표적인 재래시장이다.

시장 방문은 서민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가장 간단하면서도 또한 좋은 방법이다.

 

 

 

벤탄시장 한 구석 먹거리 코너에 앉아 뭘 먹을까 고민하고 있다.

시장 분위기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엄마 따라 다니던 바로 그 시장이다.

 

 

후이부가 권해준 볶음밥류의 식사.

제법 입맛에 맞고 맛있어서 그 뒤로 비슷한 음식을 찾아다녔지만

다른 곳에서는 찾지 못했다.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음식점마다 보여주었는데도 대부분 모른다고 했다.

어쩌면 이곳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아닌지 모르겠다.

 

 

 

벤탄 시장의 한 시계점에서 구입한 짝퉁 롤렉스 시계.

현재 베트남에서는 저작권의 개념이 희미하지만

곧 자유경제원리를 습득하면 이런 짝퉁 물건들도 곧 사라질 것이다.

 

 

 

 

 

 

 

 

 

아하누가

2003년 11월. 벤탄시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