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속에서 또 다른 여행을 떠나다

1997 일본(동경) - 혼네 속의 개선행진곡 (4-끝)

아하누가 2024. 6. 26. 00:38



1997년 9월 29일 (월)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어제의 흥분에서 조금씩 가라앉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들떠 있었다.

아침 일찍 서둘러 전철역에 나가 신문을 잔뜩 사가지고 왔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일본인들은 자꾸만 나를 혼란에 빠뜨리게 한다.

6개의 스포츠신문 중

어제의 경기를 톱기사로 다룬 신문은 오로지 한개 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프로야구의 우승팀 소식이 톱기사였던 것이다.

그때까지의 나의 생각으로는,
현재까지 내가 알고 있는 일본인이라면

제법 당당하게 톱기사로 게재를 했을 것이라 믿고 있었던 것이다.

이성적인 분석과 함께.

그러나 톱기사도 아닌 어제의 축구 경기와 관련한 커다란 사진은

더욱 황당한 것으로,
우리 선수의 반칙하는 장면과 일본팀의 스타인 ‘미우라’라는 선수가 부상당해
그라운드에 넘어져 있는 사진들이었다.

그들도 약오르는 것은 참지 못하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쳐주던 박수는 무엇이었을까?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우에노’라는 곳에 잠시 들렀다.
절이 있는 문화 공간인 이곳은 상권도 꽤 발전해 있는 곳이었다.
우리나라의 남대문 시장과 분위기가 흡사했는데

아닌게 아니라 이것저것 없는 것 없이 파는 곳이라 했다.

가격도 흥정이 가능하다니 영락없는 남대문시장인 셈이다.

많은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이곳에서도 값싼 물건은 모두 중국제가 자리잡고 있었다.
중국의 약진이 조심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전철을 타고 공항으로 향하면서 나의 혼란은 절정에 달했다.
물론 짧은 일정 동안에 그 복잡한 일본인들을 알려고 한 것은 아니다.
난 평소에 일본인을 간접적으로나마 지켜보면서 그들이 가진 몇가지 특징을
매몰차게 무시해버리곤 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느낀 일본인이라는 사람들은

나의 생각보다 그 다양성의 폭이 훨씬 컸으며
또한 속마음에 대한 알듯 모를 깊이도 무척이나 깊었던 것이다.
이들은 앞으로 이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어떻게 활용해 나갈 것인가?
우리는 얼마나 더 이들을 흉내내어야 하며

얼마나 더 이들을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또한 무엇을 배울 것이며 무엇을 욕할 것인가?
이 의문들은 아마도 평생동안 해답을 내리지 못한 채
의문으로서의 의무만을 하게 될 것이다.

전철은 나의 혼란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흔들거리고 있다.

 

공항에 도착하니 일본의 무사시절 모습을 한 커다란 인형이

고압적인 자세로 나를 내려다 본다.
내가 그 앞을 지날 때 흥얼거리던 노래가 개선행진곡이었다는 것을 알런지......

 

 


그 다음 이야기
1997년 10월 31일

 

하루 뒤 잠실에서 있을 예정인 한일 축구 경기의 응원을 위해 방문한

‘우에다 아사히’를 그가 묶고 있던 호텔에서 만날 수 있었다.
나를 보고 한 그의 첫마디는 ‘콩그레츄레이숀’이었다.
우리의 월드컵 진출 확정을 말하고 있었다.
그가 건네준 TBS의 다큐멘터리 비디오 테잎을 받아 몇번을 반복해서 보았다.
잘 만들어진 내용이었고

또한 그 제작의 의도는 자신들의 목적대로 제작되었지만
이번에는 그리 혼란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일본인은 일본인일 뿐이니까.

 

 

 

 

 

 

 

 

아하누가

일본과의 지겨운 인연은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