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속에서 또 다른 여행을 떠나다

1997 일본(동경) - 혼네 속의 개선행진곡 (2)

아하누가 2024. 6. 26. 00:37


 

 

1997년 9월 27일(토) 여전히 흐린 날씨

 

50여명의 본 팀이 도착하는 날이다.
서둘러 샤워를 마치고 방 배정을 하고 저녁식사를 위한 도시락을 주문하러 갔다.
우선 도시락 몇개를 종류별로 주문해보았다.
식사도 할겸 앞으로 올 일행들의 식단도 짤겸 미리 맛보기로 했다.


이 나라는 사먹는 문화가 매우 발달되어 있는 나라다.
편의점만 가보아도 우리는 상상도 못할

갖가지 음식들이 즉석으로 먹을 수 있도록 포장된 채 전시되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음식맛도 꽤 좋은 편이다.
아니, 좋다기 보다는 사먹는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내 느낌엔

사먹는 음식치고는 매우 성의있다는 것이다.

마치 집에서 만들어 먹는 음식처럼 말이다.

 

식사와 도시락 주문을 마치고 일행 중 2명은 본팀을 마중하러 공항에 나가고
나는 숙소에 남게 되었다. 잠시 틈을 내어 우리나라에는 보기 드문
축구전문점을 가려고 하라주꾸로 나섰다.
이것이 하루 먼저 온 프리미엄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하라주꾸에 도착한 나는 한참이나 놀랐다.
낯설어야 할 그 거리들이 몹시 친숙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마치 서울의 돈암동이나 신촌을 보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그 느낌은 그리 밝지 않은 기분으로 내게 전해졌다.

과연 지금의 이 현상이 제대로 된 것인가 하는 점이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여과없이 따라하는 것만 같다.

 

어째 좋은 기분이 아니었지만 길을 따라 계속 걸었다.
길을 걷다보니 일본에 오기전에 주변 사람들이 말하던 몇가지 얘기들이
꽤 정확한 것이었다는 것을 직접 느끼게 되었다.
거리 모습이 우리와 별 차이가 없다는 점, 그리고 영어를 대부분 잘 못한다는 점,
또 하나는 몹시도 친절하다는 것이었는데 그것들은 잠깐 동안의 시간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만큼 확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실도 있었다. 남자의 시각으로 보는 일본 여자들은
그리 예쁘지 않다고 들었는데 사실은 좀 달랐다.
그렇다고 일본 여자들이 예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을 꾸미는 일에
엄청나게 많은 시간과 돈과 정성을 투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모두들 자신에게 제일 어울리는 듯한 화장과 옷맵시를 하고 있었고
이것이 그나마 조금 예뻐 보이는 한가지 원인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는 그리 좋게 보이지 않는다. 내가 알기론 일본이란 나라가 세계에서도
여성의 지위가 낮은 나라 중 하나이기 때문에 그것은 여성의 상품화적인 사회 풍조가
만연하고 있음을 쉽게 느낄 수 있는 장면이기도 했다.

 

 

주변을 유심히 둘러보니 몇가지 유행이 눈에 띈다.
남자들이 쓰고 다니는 털모자 - 몹시 더워 보였는데도 그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너도나도 쓰고 다녔다 - 와 여성들이 주로 착용하고 있는 코걸이였다.
아마도 머잖은 시간에 우리에게도 들어올 것이라는 생각이 드니

이 또한 씁쓸해진다.
별로 멋져 보이지도, 그렇다고 실용적으로 보이지도 않는

유행 같아서 더욱 그렇다.
아마도 이곳에서 손가락을 4개로 만드는 게 유행이 된다면 그것마저 따라할까?
아무래도 나는 이 나라와 그리 좋은 관계는 아닌가보다.
눈에 보이는 무엇 하나가 곱지 않게 보이니 말이다.

뿐만 아니라 간단한 일본어 인사말도 애써 거부한 채

잘 하지도 못하는 영어를
큰 소리로 떠들어 대면서 돌아다니고 있음이 또한 그렇다.
인간적으로 그들을 맞닥뜨리지 않고
국민감정으로 가장한 선입견을 너무 앞세우고 있는 것이 아닐까 걱정된다.

 

 

숙소로 돌아가니 산더미 같은 일이 기다린다.
침구의 시트를 일일이 갈아야 하는데 그곳의 일손만으로는 터무니 없는 일이었다.
내가 땀을 흘릴 필요는 전혀 없었지만 팔을 걷어부치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하루 먼저 온 프리미엄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하지만 이것이 우리 정서 아닌가?

 

 

 

       *    *     *

 

 

 

저녁이 되어서야 본팀이 도착하고 내일 있을

축구 경기 응원에 대한 준비를 했다.
참으로 대단한 열정들이다.
이런 열정들이 있으니 절대로 내일 경기에는 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내가 감독이라도 된 듯한 착각을 하는가 보다.

 

몇가지 준비를 마치고 바람도 쐴겸 밤거리 구경도 할 겸
숙소와 가까운 ‘이케부쿠로’라는 곳으로 갔다.
꽤 커다란 상권이 발달한 곳처럼 느껴졌는데 보여지는 모습은
서울의 종로 뒷골목 정도 될까?

하지만 특별히 가볼만한 곳을 찾는 일이란
처음 이곳에 온 내게는 쉽지 않았다.

 

‘프리쿠라’라고 불리우는 자동으로 사진을 찍고
작은 스티커 모양으로 인화해주는 자동판매기(우리나라에도 쉽게 볼 수 있다)와
커다란 건물을 송두리째 쓰고 있는 대형 오락실이 눈에 띠었을 뿐이다.
아마도 곧 우리나라에서도 볼 것 같은 반갑지 않은 생각이 또 들었다.

 

전철을 타고 록본기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은 대중 교통의 대부분이 전철이어서 전철 문화가 상당히 발달되어 있다.
더욱이 이 나라는 자판기 문화 또한 무척 발달한 곳이어서
전철표를 파는 자동판매기의 경우 그 성능이나 정밀도가 매우 좋다.
개찰구 또한 정밀하게 되어 있어서 승차권을 어느 쪽이든 관계없이
넓다란 투입구를 향해 던져 넣어도 빨려 들어가듯 접수된다.
하긴 우리의 지하철에서 쓰고 있는 것들도 불편 없이 쓰고 있으니
무조건 부러워하거나 칭찬할 것도 없긴 했다.
록본기라는 곳은 우리로 말하면 이태원에 해당되는 느낌이 드는 곳으로,

외국인도 많고 젊은 일본인들로 거리가 붐빈다.
조금 더 오래 있으려해도 만만치 않은 이곳의 물가가 숙소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택시를 직접 타지는 않았지만 꽤 비싸다는 얘기였다.
동남아 국가를 방문한 것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여행을 하고 있는 셈이다.

 

 

숙소로 돌아오니 모두들 내일 있을 응원 준비를 하면서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방안에 들어와 내일 던질 화장지를 둘둘 말고

또 내일 뿌릴 종이들을 자르고 있는데
아무도 알아듣는 이 없이 쓸쓸히 켜져 있던 TV 방송이 어째 심상치가 않았다. 
말로만 들어오던 것들을 실제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곳 TV프로그램을 보면서 크게 두가지를 느낀다.
하나는 꽤 많은 우리 방송 프로그램이 일본의 방송을 모방한다는 것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고

또 하나는 지나치다 싶은 일본의 개방된 성문화에 대한 것이었다.
두가지 모두 내게는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여행을 시작하면서부터 그러했지만

일본이란 나라가 가지고 있는 색깔을 구별하는 데 있어
많은 것들이 계속 나를 혼란에 빠져들게 했던 것이며,

방송 프로그램 또한 그중의 하나였다.
혼란은 점점 심해진다. 이것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혼란 속의 둘째날은 그렇게 저물고 있었다.

 

 

 

 

 

 

 

아하누가

1997년. 비록 축구경기였지만 그때는 정말 비장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