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9월 28일(일) 흐림
이번 여행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있는 날이라
다른 날 보다 몹시 긴장된 아침을 맞았다.
서둘러 전열을 가다듬고 우리는 마지막 응원 연습을 위해 시내에 있는
재일동포를 위한 학교운동장에 모였다.
교문에 써있는 명판을 보니 왠지 모를 뭉클함이 가슴을 저미어 온다.
비로소 내가 일본 땅에 와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우리와 같은 목적으로 이곳에 온 다른 응원단과 합류하여
마지막 호흡을 맞추어 보았다.
낯설지 않은 교복을 입고 지나가며 우리를 쳐다보던
교포 학생들의 눈길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오늘의 경기를 이겼으면 하는 바램뿐이었다.
일본 땅에 도착하면서부터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TBS 방송의 스탭진들도
여전히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들의 다큐멘터리 방송 제작을 위해
서울에서부터 계속 우리를 밀착 취재중이었는데
그 노력과 성의, 그리고 그 치밀함이 몇번이나 나를 감동시키곤 했다.
그러한 그들의 모습은 응원연습중에 있었던 우리 방송사의 거만한 태도에서
더욱 확연하게 비교되어 일본인들에 대한 나의 사고를 또 한번 혼란스럽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차를 타고 경기장으로 가니 줄서있는 일본 관중들의 열기가 보통이 아니어서
그렇지 않아도 긴장되어 있는 나를 또 한번 긴장시켰다.
하지만 나 역시 비장한 각오로 경기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경기장 안으로 들어서니 그 열기는 극에 달하고 있었다.
아직 경기가 시작하려면 세시간 가까이 남았는데도 지정석을 제외한 일반석은
이미 가득차 있었으며 벌써부터 열띤 응원전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의 압도된 분위기였지만 곧 안정을 찾고
그 응원의 함성속에서 우리의 목소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던중에 일본 응원단에서부터 파도 응원이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약 5~6,000명이 자리한 우리 자리까지 와서 그 파도가 멈춰버리자
그들은 심하게 야유하기 시작했다(이 부분은 아주 재미있는 부분이다.
우리는 계속 파도 응원에 응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응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한달여 뒤 서울에서 있었던 한일전에서 그들은 우리의 파도 응원을
같이 따라했었다. 참으로 흥미로운 부분이다).
파란색 보다는 빨간색이 주는 느낌이 더욱 위협적이라는 생각이
몹시도 다행스럽게 여겨지고 있었다.
경기는 2:1의 멋진 역전승으로 끝났다.
일본에 온 것이 참으로 보람된 것임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때의 그 기분이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극한 상황이었다고나 할까?
우리를 태우고 갈 버스가 있는 곳으로 오는 길은
일본의 관중들과 섞여지는 곳이었는데도 그리 위협적인 느낌은 받지 않았다.
과연 이들이 우리보다 더 이성적인가? 아니면
정당하게 패배를 인정하는 것일까?
우리의 경우를 가상하여 생각해보니 그 답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버스가 있는 곳에 도착하여 우리끼리 기쁨을 나누고 있을 때였다.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일본 국가대표팀의 유니폼을 입고 있던 여고생으로 보이는
세학생이 길바닥에 앉아 하염없이 흐느끼고 있었다.
분위기가 숙연해져서 잠시 우리의 기쁨을 참아두려는데 이들이 다가온다.
그러더니 셋이서 연습이나 한 것 처럼 우리 앞에서 박수를 치며 축하한다며
90도로 허리숙여 마치 절에 가까운 인사를 한다.
앞이 깜깜해지다 못해 소름이 돋았다.
무얼까? 아니 왜 그랬을까? 강자에 대한 인정인가?
아니면 상투적으로 나오는 행동인가?
난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이것이 자신의 속마음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일본인 특유의
혼네(本音)라고 단정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런 행동이 나오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런 사회 환경에 익숙해져버린 로보트와 같은 행동일 것이라
생각을 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왜? 어째서 나는 자꾸 그들을 비하하려 하는가?
저녁 식사는 승리의 향연과 함께 ‘우에노(上野)’에 있는 한 식당에서 이루어졌다.
많은 사람이 우리를 도와주었는데 특히 재일동포 3세이며
한국땅을 한번도 밟은 적이 없다는 ‘신무광’이라는 친구의 도움이 컸다.
이 친구는 몹시도 감동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리를 함께 한 대부분이 젊은 사람들인데다 승리의 기쁨에 들떠 있어서
분위기는 무척이나 뜨겁게 이어졌는데 가만히 눈여겨 보니
여전히 TBS 촬영팀은 분위기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들의 일을 충실히 하고 있었다.
분위기에 들뜬 우리 일행이 그들에게 수고했다며 건배를 제의했다.
몇번을 사양하다 분위기에 못이겼는지 곧 제의를 받아들였는데
한국식 ‘원샷’이 몹시도 곤욕스러운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의 분위기를 깨지 않으려 최대한으로 노력하고 있는 것 같았다.
또 많은 혼란이 왔다.
직업도 직업이지만 우리가 즐거운 만큼 그들의 기분은 그렇지 아니할텐데
그들의 행동에서는 우리를 축하해주는 모습밖에는 다른 어떤 모습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도 순수하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무래도 나는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심한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는가 보다.
아하누가
박진감 넘친 경기는 서정원, 이기형의 득점으로 한국의 역전승.
이 경기는 한국의 1988 프랑스 월드컵 진출의 결정적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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