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3월 30일 (월요일)
아침에 방콕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푸켓을 떠난다는 사실이 어쩐지 반갑게 느껴졌다.
태양이 강하게 내려쬐는 날이어서 그랬는지 지난 밤에 대한 기억은 강한 햇볕에
조금씩 사라져가고 있었다. 방콕에 도착했다.
오가는 거리의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방콕이 엄청난 교통 문제를 안고 있는 곳이라는 사실이
어렵잖게 떠오를 수 있었다.
이곳에 오니 3륜 툭툭이 보인다. 책에서 보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는데
푸켓에서는 한대도 보지 못하다가 방콕에 오니 보이기 시작한다.
오토바이를 개조했는지 핸들이 불안정하게 보여져서
아마 나는 불안해서 못탈 것만 같다.
이곳의 관광명소라는 왕궁에 도착했다.
이곳은 태국의 왕들이 살던 곳으로 방콕의 유명한 관광지며 왕에 대한 경의를
중요하게 생각하여 그 관광 절차가 제법 까다로운 곳이다.
반바지나 슬리퍼, 소매없는 옷으로는 출입이 불가능하고 또 현지 가이드만
관광객을 인솔할 수 있다. 나름대로는 그 의도에 대한 의지가 보인다.
우리도 한국말을 하는 현지인을 따라 왕궁을 쭉 둘러 보았는데......
난 이 왕궁을 보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문화의 우수성만을 새삼 확인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여긴 그리 볼 만한 것이 없다.
자고로 금이라 함은 목조나 석조 건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빛나게 하여
전체적인 품위를 높이는 역할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기는 그저 무지막지하게 커다란 건물을 몽땅 금색으로 칠해버렸다.
그랬으니 그것이 웅장할까? 아니면 아름다울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싫증나는 거부감만 자꾸 와 닿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2년전 여름휴가 때
잠깐 들렸던 불국사의 경내를 아무 감흥없이
휙 둘러본 내가 창피하게만 느껴지고 있었다.
또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라는 좋은 책을 보는둥 마는둥 하며
휘적휘적 넘겨버린
나의 부족한 주체성이 부끄럽게만 느껴지고 있었다.
이곳 왕궁이란 곳은 그들이 내세우는 것과는 전혀 달리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의 탄성을 불러 일으킬만한 부분이 아무데도 없었다.
건물의 구조며 쓰여진 양식이며, 하물며 우리의 기왓장에 해당하는 소재에도
미적인 면이라곤 전혀 없어 보인다.
이들이 이곳 저곳에서 건축 양식을 빌어 지었다는 건축물을
그들은 꽤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동남아에서는 유일하게 식민지배를 받지 않은 자신들의 뛰어난
외교 능력과 연관시키는 듯 했다.
갑자기 우리나라에서 흔히 보던 기왓장의 곡선이 생각났다.
고려청자 같은 자기 등을 통해 우리가 강조하는 곡선미라는 것이
왜 아름다운 것인가도 창피하지만 처음으로 느끼고 있었다.
참으로 우리 문화는 수준이 높은 문화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이 약했던 이유는
다름 아닌 규모에 대한 컴플렉스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하긴 우리가 자랑하는 문화 유적들이 비슷한 문화를 가진 중국에 가면
얼마든지 웅장한 규모의 것들을 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또한 광활한 협곡이나 빙하,
엄청난 크기의 폭포나 산 같은 것도 없을 수 밖에 없기에
규모에 대한 컴플렉스는 점점 심화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난 이번 왕궁 방문을 통해서
우리 선조들의 뛰어난 미적 감각을 깨닿게 되었다.
그것은 크다고 좋다는 것만은 아니라는 평범한 사실과
또 우리 선조들이 크게 만들줄 몰라서 작게 만들었던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가장 자연과 잘 어울리는 규모로 만드는
절제된 아름다움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산이 많은 지형적인 특징을 최대한 활용하여 자연의 조화에 위배됨이 없도록
모든 문화적 장식을 이끌어 낸 것이다.
이런 뛰어난 문화적 가치를 보잘 것 없고
볼 것 없는 방콕의 왕궁에 와서야 느끼고 있음이
계속 부끄러움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배를 타고 수상가옥이 있는 곳을 지나 새벽사원으로 향했다.
말로만 듣고 TV에서나 보던 그 수상가옥이라는 것도 막상 와서 눈으로 보니
그 느낌이 좋질 않다. 그곳이 관광지라는 것 자체가 몹시 불쾌하다.
우리는 우리의 관광 문화를 어떻게 개발하고 발전시켜야 할 것인가?
나하고는 전혀 관계없을 것만 같은 의문이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방콕의 교통난은 몹시도 유명해서 세계의 토픽으로 자리잡은지 오래되었다.
가이에게 들은 우스갯 소리 하나가 생각난다.
꽉 막힌 도로에서 운전을 하는 운전수가 담배를 피워물면
30분 이상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고, 시동을 끄고 신문을 보기 시작하면
1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며,
차에서 내려서 주변의 운전자들과 잡담을 하기 시작하면
언제 다시 출발하지 모른다는 조금 과장 섞인 이야기다.
어쨌든 차가 막히는 바람에 나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왜냐하면 저녁 7시 30분에 내가 묵게 될 호텔에서
한 현지인과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방콕으로 오기전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선박회사 양선장님이
방콕에 있는 관계 회사의 직원 한명을 소개해줄테니
저녁에는 그 친구의 안내를 받으라며
만나는 시간과 장소까지 약속을 해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도저히 7시 30분까지는 호텔에 도착할 것 같지 않아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호텔로 전화를 해야 했다. 누군가 나를 찾는 사람에게
1시간이나 1시간 30분 정도 늦겠다는 메시지를 남겨 달라고.
저녁 식사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오니 저녁 9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서둘러 프론트에 가보니 다행히 나를 찾는 사람은 아직 없었던 모양이다.
내가 아까 전화로 남긴 메모를 보니 가관이다.
거기에는 내가 1시에서 1시30분 사이에 올 것이라고 적혀있었다.
하긴 내 영어 실력이니 그럴만도 하지......
다행히 불과 5분도 지나지 않은 시간에 나를 찾는 전화가 왔다.
비라트(VIRAT)라는 현지인인데
한국에서 캡틴 양의 부탁으로 지금 호텔로 오고 있다는 것이다.
30분뒤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나눌 수 있었고
나는 그 친구의 차로 방콕 시내를 여유롭게 돌아 다닐 수 있었다.
비라트와의 만남으로 여행에 있어서 현지인과 대화를 나눈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중요한 것이며 또한 여행에서는 빠질 수 없다는 것임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이건 정말 중요한 부분이다.
어떤 나라를 방문하면서 그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그저 주변만 둘러보고 온다는 것은 참으로 ‘죽은 여행’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짧은 기간에 많은 얘기를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것은 몹시 중요하다.
비라트(VIRAT)라는 젊은 친구는 방콕 부근의 한 선박회사에 다니는 회사원인데
생김새로는 전혀 태국인 같지 않고 오히려 우리나라 사람같이 보였다.
나이는 약 30세 남짓 보였는데 점잖은 사람이어서
나 역시 행동에 각별한 주의를 해야만 했다. 처음으로 태국사람을 본 것 같다.
며칠간 태국에 있으면서도 말해본 태국인들이라고는 툭툭 운전수나 상점 주인이
고작이었으니 말이다.
태국이나 한국이나 경제적인 어려움이 많을텐데
요즘 근황이 어떠냐고 묻는 그의 말에
우리는 전혀 걱정될 것이 없다고 큰 소리는 쳤지만 어째 개운치가 않았다.
여기도 IMF 등과 관련된 경제 여파가 큰 모양이다.
비라트와 함께 책을 통해서만 보던 팟퐁거리로 나섰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규모가 작다.
푸켓에 있는 파통비치의 번화가보다도 훨씬 작은 것처럼 느껴진다.
비라트의 말에 의하면 이미 한물 간 곳이라 한다.
지금은 파타야 쪽이 더 번화하다고 한다.
하지만 더 번화한 곳이면 무엇하랴..... 또 그 저급한 관광 문화지만 늘어날텐데.....
너무 늦은 시간까지 같이 있기가 미안해서 괜찮다는 비라트와 헤어졌다.
참 좋은 사람이다.
그럴 수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그가 이 글을 볼 수 있다면
이 지면을 통해서라도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팟퐁에 혼자 남게 된 나는 이곳저곳을 둘러 보았다.
이곳은 처음부터 끝까지 관광으로 이루어진 곳이다. 상점이든 술집이든
모든 게 관광객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또한 업종과 관련된 말 말고는
영어도 잘 못하는 것 같다.
태국이 이러한 관광지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은 1960대말 월남전 때문에
월남과 미국을 오가던 미군 관계자들이 태국을 거쳐서 오가곤 했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아마도 이들은 자신들의 색깔을 내기도 전에 이미 상업주의에 근거한
저급한 관광 문화와 상품들이 자리 잡게 된 것일 게다.
그래서 그런지 별로 특별한 색깔이 없다. 어쩌면 그게 전부일지도 모르지만.
시간이 꽤 늦었다. 호텔로 돌아가야 하는데 제법 먼 길이다.
택시로 약 20분 정도?
서둘러 택시를 잡는다는 것이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다.
METER TAXI라는 램프를 켠 택시를 잡았어야 하는데
팟퐁거리 진입로에 램프가 꺼진 채 줄지어 있는 택시로
그만 발걸음을 옮기고 만 것이다.
내가 묵고 있는 숙소까지 얼마냐 물으니 300바트를 달란다.
정상적인 요금이라면 100바트도 안 되는데.
마침 태국 돈은 가지고 있는 것이 없고
달러밖에 없기도 해서 그냥 가기로 하고 달러로는 얼마냐 물으니
10달러를 달란다. 도둑놈.
10달러면 380바트인데, 300바트 내는 것도 아까워 죽겠는데......
시간도 늦고 밖에는 많은 삐끼들이 서성이고 있어서 귀찮기도 해서
그러기로 하고 호텔로 향했다. 호텔에 도착하니 또 문제가 생겼다.
내가 가진 달러는 20달러짜리였던 것이다.
녀석은 20달러를 받고는 거스름돈을 거슬러 줄 생각을 하는지 안하는지
돈만 만지작거리고 있다.
왜 거스름돈을 안주냐고 물으니 200바트 밖에 못거슬러 주겠단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나는 왠만하면 좋은 기분으로 태국 여행을 마치려고 참고 있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그 운전수한테 따졌다.
“야 임마! 300바트에 10달러 쳐서 오기로 했는데 20달러 냈으니
10달러 만큼인 300바트는 최소한 거슬러 줘야지 안그래?”
녀석은 듣는둥 마는둥 하더니 그래도 200바트밖에 못거슬러 주겠단다.
어이가 없어서 뒷좌석에서 별 생각을 다했다. 그냥 강도로 돌변해 버릴까?
킥복싱이고 나발이고 국가 자존심 걸고 한판 뜨면 안지는 사람이 한국사람 아닌가?
이걸 한바탕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데
호텔 경비원으로 보이는 청원경찰이 눈에 띄었다. 얼른 창문을 내리고 그를 불러
자초지종을 말하니 그 경찰은 태국말로 운전수와 얘기를 나누더니
나보고 들으라는 말로 운전수에게 영어로 450바트를 거슬러 주란다.
푸하하하..... 녀석, 가만히 있었으면 150바트나 더 챙기지....짜식.
미소의 나라라는 태국에서의 마지막 밤을 나는 씁쓸한 미소와 함께 보내고 있었다.
1998년 3월 31일 (화요일)
아침 식사를 마치고 공항으로 향했다.
4박 5일간의 태국 여행이 모두 마무리되는 순간이다.
물론 그 짧은 일정 동안 내가 태국이란 나라에 대해 알려고 했다거나 또는
단면만으로 태국 전부를 평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그동안 다니 코스는 모두 휴양지나 관광지였기 때문에
더욱 알 수 없는 의문만 생길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태국을 떠나는 공항에서 나는 다시는 태국을 방문하지 않기로 했다.
매력없는 나라라고 단정해버리고 있었다.
어느덧 김포공항에 도착한 나는 집으로 향하는 택시안에서 구부러진 도로의 양쪽을
마치 아름다운 곡선의 신비로움으로 여기고 있었다.
아하누가
그러나 2009년 나는 다시 방콕을 방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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