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전에 있었던 일이다.
집에 들어오니 여동생과 남동생이 사이좋게 마주 앉아
무언가 주거니 받거니 하며 매우 즐거운 표정으로 놀고 있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손에는 감이 쥐어져 있었는데
한사람이 손에 쥐고 다른 사람에게
손안에 있는 것을 만져보라고 하고는 서로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감 잡혀?”
“아니, 잘 안 잡혀”
“자, 이제 감 잡혀?”
“응, 감 잡았어”
“이번엔 니가 할 차례야”
그리고 각자 역할을 바꾸어
또 다시 그 대화 및 이에 상응한 액션을 반복하고 있었다.
아무리 동생들이라고 해도 이때 나이가 이미 20대를 넘어선 나이었으니
어린애들 장난도 아닐텐데 그렇게 놀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정말 놀구들 있네...”
어이가 없어서 한마디 툭 내뱉으니
동생들은 나보다 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마징가 제트에 나오는 아수라 백작이라도 된 것처럼 둘이 듀엣으로 반문한다.
“오뼝두 해봐, 되게 재밌어”
오빠와 형이 동시에 발음되니 약간 이상하게 들렸지만
그건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고
단지 중요한 것은 아이러니하게 그 뒤로 나도 그 틈에 끼어
‘감 잡았냐?’를 반복하며
그 단순한 놀이 아닌 놀이를 반복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 * *
가끔 뻔히 결과도 알고 내용도 아는 얘기나 행동이
재미있어서 몇번 더 할 때가 있다.
우리 집 식구들의 성향은 대부분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더 재밌게 즐기려는 스타일이지
새로운 것을 찾으려는 무모하고 불확실한 모험은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꼭 그 성향 때문만은 아니지만
가끔씩 동생들은 단순 반복에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을 상당히 즐기곤 했으며
이것이 즐거움을 누리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 중 수준이 매우 높은,
고도의 경지에 이른 고수들만의 게임이라고 늘 자부하고 있었다.
그렇게 반복적인 대화중에 아직도 기억나는 얘기가 하나 있다.
남들도 잘 알고 있으며 또한 남의 것 베껴 먹기 좋아하는
저질 만화가가 잘 써먹는 어느 바보 형제의 얘기다.
이해하기 쉽게 바보 형제를 A,B로 나누어 대화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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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내 손안에 있는 동전에 몇갠지 알아 맞추면 이 안에 있는 2개 다 주지!
B: 음....3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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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는 누구나 다 한번쯤 들어봤음직한 얘기다.
얼핏 듣기엔 매우 평범한 이 얘기를 응용력 뛰어나고 암기력 좋은 동생들이
조금 더 업그레이드를 시켰다.
다음은 업그레이드 된 내용을 조금 전의 A,B 형식으로 정리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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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내 손안에 있는 동전에 몇갠지 알아 맞추면 이 안에 있는 2개 다 주지!
B : 음....3개!
A : 맞았다! 자, 4개!
B : 와! 다섯개다!
A : 바보, 여섯갠데...
B : 어? 일곱개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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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내용의 대화를 가지고 동생들과 나는 심심하면 또는
그와 비슷한 실제 상황이 연출되면
여지없이 이 대화를 나누는 신종게임을 즐기곤 했다.
하지만 이 놀이 아닌 놀이는
대부분 식구 외의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곤 했다.
남이 알면 안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때 보다 더 오래전에 형제가 레스토랑에 간적이 있었다.
주문 받는 웨이터에게 막녀 녀석이 ‘메뉴 주세요’라고 말하자
이어 여동생이 매우 쑥쓰럽다는 얼굴로 ‘저도 메뉴로 주세요’라고 주문했다.
이미 정신이 혼미해진 웨이터는 당황하여 매우 흔들린 눈빛을 보이고 있었는데
그때 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럼 메뉴로 3개 주세요”
잠시 심각한 표정을 짓던 웨이터는 무언가 굳은 결심을 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메뉴는 음식이 아닌데요...”
이 정도 상황이면 웃음이 나와도 참아야 한다.
양쪽뺨을 풍선처럼 부풀리고 허벅다리를 손톱으로 꼬집으며 참았지만
인내력 약한 막내가 결국 웃음을 터트리면서
우리 형제들은 참을 수 없는 웃음을 폭발적으로 터트리는 바람에
주위가 엉망이 되고 웨이터의 불쾌한 눈총을 받아야만 했었다.
이런 일이 있고난 뒤 형제들의 생각엔
우리의 고난도 유머를 이해하는 일반인은 드물다는 인식을 함께 하고는
그 뒤로 철저하게 지하세계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런 행동들은 혹시라도 남이 보면
정말 이상항 형제들로 볼까 늘 걱정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자존심은 있어서 이런 식의 단순한 대화의 반복이야말로
기억력과 인내력, 그리고 응용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상당히 수준이 높은 고난도의 대화라고 애써 자부하고 있었다.
* * *
그 뒤로 10년도 훌쩍 지나버린 어느 날. 미국에 살고 있는 동생들을 만났다.
이미 나이는 30대에 자리잡고 있었고 다들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 있었다.
이런 저런 얘기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지내다
손에 무언가를 꼭 쥐고 있는 여동생에게 말을 건넸다.
“너 손에 쥐고 있는게 뭐니?”
그 질문이 입에서 나오는 순간,
동생들과 나의 뇌리에는 지나간 기억들이 동시에 떠올랐다.
그 순간은 이미 누가 말하지 않아도 그림같은 추억이 오랜만에 반복되어야 하는
순간이기도 했으며
또한 세상이 1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려는 순간이기도 했다.
모두들 같은 생각이었는지 짧은 시간이었지만 위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다시 그 단순 반복의 대화를 시작해야 할 바로 그 즈음
여동생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오빠, 내 손안에 있는 돈이 얼만지 맞추면 이 안에 있는 10달라 다 주지...”
형제는 변하지 않는다. 다만 돈이 변할 뿐이다.
아하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