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에는 누구나 한번씩 경험해본 꾀병이라는 것이 있다.
이 꾀병은 대부분 학교에 가기 싫을 때 생기는 병으로 약간의 미열만 있으면
‘병’으로서 훌륭한 조건을 갖추게 된다.
여기에 약간의 기침과 초췌한 표정만 가미되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환자의 자격을 갖추게 된다.
누나들은 가증스럽게도 뜨거운 아랫목에 머리를 비비고
뜨거운 머리를 어머니께 들이대는 비양심적인 행동도 과감히 시도했지만
나를 비롯한 동생들은 최소한의 양심은 지키면서
자가발전을 통해 체내 열기를 생산하는 방법을 늘 택하곤 했었다.
그런 꾀병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즈음이면
어머니는 늘 복숭아 통조림을 한통 사오시곤 했다.
깡통 표면에 ‘황도’라고 크게 쓰여 있는 이 특별식은
오직 환자로 인정받은 사람만이 먹을 권리가 있었으며,
비환자인 형제들은
환자만의 특별한 권리를 몹시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곤 했었다.
간혹 어떤 날은 어머니께서 무슨 생각이신지 황도 통조림을 넉넉하게 사와
환자는 물론이고 다른 형제들에게도 똑같은 권리를 주실 때가 있었는데
이럴 때는 황도통조림을 먹을 수 있도록 해준 꾀병 환자가 공로자의 대접은커녕
아주 파렴치한 공갈자해단으로 취급받는 기현상이 일어나기도 했었고,
가끔 그런 일이 생길 때 꾀병을 일으킨 당사자는
그 억울함에 꾀병이 바로 홧병으로의 합병 증세를 유발하기도 했었다.
몇번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동생들과 나는
급기야 ‘황도병’이라는 새로운 암호를 만들어 서로 순번을 정해 돌아가며
꾀병을 부리는 사악한 동맹을 결성하는데에 이르게 되었다.
간혹 터무니없는 꾀병을 일으킨다거나 또는 어머니의 컨디션이 극히 안좋을 때
순번에 걸리는 사람은 환자 대접은 둘째치고 몽둥이 세례를 받은 적도 있어
이에 따라 황도통조림 쟁취의 높은 성공률을 위한 발병의 적시성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하기도 했었다.
또한 어린 시절에는 아직 일본 어투에 더 익숙한 어머니 때문에
우리도 통조림을 ‘간즈메’라고 부르기도 했었는데 이런한 왜색 짙은 교육은
향후 우리 식구들이 정확한 한국식 표현을 하는데
적지 않은 일조를 하기도 했으니
역시 부모님의 은혜는 놀랍기만 한 것 같다.
* * *
최근 며칠간 몹시 아팠다.
밤마다 아들 녀석하고 마누라만 잠들면
집밖으로 기어나가 게임방에서 시간 보내느라 지나치게 피로한 생활을 했더니
그만 편도선이 부어 머리가 지끈거리고 골치가 띵띵거리며
아픈 증세가 계속 되었다.
게다가 할 일은 많아 이것저것 분주하게 움직이다보니 금세 낫지는 않고
같은 증세만 며칠 째 반복되어 짜증스런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어느 하루는 집에 들어가면서 가게에 들렀더니
아직도 비슷한 포장을 띤 ‘황도’라는 통조림이 그대로 있었다.
처음으로 내가 내 돈 주고 직접 그 통조림을 샀다.
하지만 왠지 맛이 그전 같진 않다.
그전엔 일본식 표현으로 ‘깡기리’라는 깡통 따개로 어머니께서 따주셨는데
지금은 원터치 캔이 되다보니 그리 힘들이지도 않게 땄으며,
따라서 침을 삼키며 지켜보던 긴장감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또한 옆에서 당연히 침을 흘려야 하는 동생들도 이미 곁에 없이
저마다 각자 살림들 차리고 가장이 되었으니
이야말로 쓸쓸한 나만의 황도병 아닌가?
혹시나 해서 아들 녀석을 한조각 떼어줬더니
별로 맛이 없는지 이내 내뱉고 만다.
그러고보니 나도 별로 내키지 않아서 더 이상 못먹을 것 같다.
전혀 달라진 주변의 환경과 세상의 풍요가 가져다준 입맛의 변화 때문에
황도에 담겨진 오래전 추억 하나가 이제 내게서 멀리 떠나가려는 모양이다.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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