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는 콜라보다 진하다

전화

아하누가 2024. 6. 25. 23:49


 

 

 “그러니까 말이야… 내 말 잘 들어…
  목소리가 조금 굵고 말을 천천히 하는 남자가 날 찾으면 없다고 하고,
  그 나머지 경우는 날 바꿔줘야 해. 알겠지? 꼭!”

 

 

 


대학생이던 작은 누나는 당시 중학생이던 내가 못 미더워서인지

몇번을 확인하고 또 주의를 주고 연습을 시켰다.
아마도 누군가 귀찮게 구는 친구가 있으며,

꼭 받아야 할 전화 또한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앞으로 있을 일에 대비해서 목소리를 몇번씩 가다듬고
나름대로의 시나리오를 구상하고 있었는데

누나는 어린 중학생에게 그 일을 맡긴 것이 못내 불안한지

전화기 앞을 계속 서성이고 있었다.
지금 같으면 도와주는 척하면서 장난을 해봄직도 했지만
그 당시 나의 정신 연령으로는 시키는대로 할 수 밖에 없었다.
어쩌면 지금의 정신 연령이 더 중학생에 가까운 걸 지도 모르겠지만.

 


 “때르르르릉…”

 

 

굉음을 울리며 전화벨이 울린다.

마치 올 것이 왔다는 듯한 긴장된 분위기가 남매 사이에 맴돈다.
다시 한번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으려는 순간
어린 중학생을 끝내 믿지 못한 누나가 직접 전화를 들고야 말았다.
누나는 나름대로 받아도 괜찮다는 느낌이 왔던 것 같았지만
불행히도 가장 우려했던 상황은 이미 벌어지고 말았다.
전화를 받은 누나의 얼굴이 일순간에 일그러지더니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애써 다른 사람처럼 말하고 있었다.

 

 

 “아~ 걔가요… 지금 … 나가고 없는데요~”

 

 

내가 들어도 어색한 말투였다.
상대방도 그 어색함을 분명 느꼈겠지만 물증은 없고 심증만이 가득한 상태라
달리 어쩔 방법이 없었던 것 같았다.
단지 그저 어디 갔느냐는 평상적인 질문 밖에는 할 수 없었으리라.

그러나 지극히 평범한 그 질문에 누나는 몹시 당황해 버리고 말았다.
차라리 나에게 그 일을 시켰으면 모른다는 한마디 대답으로 끝내버렸을 것을
자신이 아무 대책없이 직접 전화를 받아 버렸으니 몹시도 당황할 수 밖에.

 

 

 “저~ 그게…….”

 

 

누나는 몹시 당황한 얼굴로
수화기를 손바닥으로 꼭 가린 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내게 물었다.

 

 

 

 “은태야, 나 지금 어디 갔니?”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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