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는 콜라보다 진하다

복권

아하누가 2024. 6. 25. 23:52


 

얼마전 막내 동생 결혼식에 참석하고자 미국에 갔다.
피는 콜라보다 진하다의 글에 <여물통>과 <20년후의 복수> 등

많은 소재를 제공해주었던 바로 그 동생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식구들 모두가 미국에 살고 있어서

모두가 한자리에 모인 것이 10년도 훨씬 넘은 일이었다.
그동안 시카고에서, 아이오와에서 그리고 서울에서 분당에서
각각 일부분의 식구들이 모인 적은 수시로 있었지만

이렇게 대규모적이며 총동원적으로 모인 일은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반가운 해후를 하고

이런저런 얘기들로 즐거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막내가 어디선가 들었는지 뭐 중요한 일이라도 되는듯

흥분하며 떠들어댔다.

 

 

“형! 이번주 복권 당첨자가 없어서 다음주 당첨금이 300만불로 올랐대...”

 

 

300만불?
처음에는 300만원으로 들어서 참 미국치고는
복권당첨금이 몹시도 치졸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다가 그것이 300만원이 아니라
300만불이라는 생각을 하고는 머릿속이 몹시도 어지러워졌다.

300만불이라면

어렸을 때 TV로 보던 600만불의 사나이 반쪽을 만들 수 있는 금액이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해도 쉽게 액수가 피부로 와닿지 않아
다시 이를 한국돈으로 환산하여 사고의 폭을 경제적 측면으로 넓히기로 했다.
대충 1달러를 1000원으로 잡아도 30억원이다.

세금 떼고 뭐 떼도 최소 15억원은 남는다.
15억원으로 무엇을 할까? 일단 마누라 반을 떼주자. 기분이다.

그러면 7억5천만원.

 


이 돈이면 하이텔 통신을 6250년간 쓸 수 있다.
그리고 아들 후연이가 좋아하는 새우깡을 매일 한개씩 사주어도
자그마치 5137년간 사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욕심에는 한이 없어서 자꾸만 하고 싶은 것이
많아지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7억5천만원이란 돈은 자꾸 모자라는 금액으로만
느껴지기 시작했다.

 

맞다.

아까 마누라 떼어주기로 한 7억5천만원만 안주면 이 모든 것들을
두배로 즐길 수 있게 된다.

그렇다. 문제는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복권에 당첨되고도 마누라에게 돈을 뺏기지 않는 방법이란?

  

 

          *          *          *

 

 

그래서 내린 결론은 복권에 당첨되면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된다는
매우 간단하고도 확실한 한가지 방법이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 할 수 있는 생각으로는 매우 파렴치한 발상이었지만
어차피 상상으로 그치고 말 일인데 그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지 않은가?

 

하지만 또 하나의 문제는 내가 복권에 당첨되고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이곳에 있는 식구들이 얼마나 나를 나쁜 놈으로 볼 것이며
또한 그 눈치 속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걱정이었다.

 

 

“형! 뭘 그리 생각해?”

 

 

잔뜩 잔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막내 녀석이 묻는다.

고개를 돌려보니 막내뿐 아니라
누나 여동생, 그리고 어머니까지 궁금한 표정으로 모두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그냥....”

 

 

그러다가 갑자기 식구들의 의중이라도 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가벼운듯한 말투로 넌지시 말을 꺼냈다.

혼잣말처럼 던진 이 말은 나름대로 몹시 신중했으며
또한 많은 의도를 담고 있었으므로

최대한 자연스러우면서 또 농담인 듯 하면서
다분히 진실성이 포함된 목소리를 내야 했다.

 

 

“저기.... 나 그 복권 맞으면 한국에 가지 말아야지 흐흐흐”

 

 

아니나 다를까.

 그 소리를 듣자마자 식구들은 매우 놀란 얼굴로,
또 때론 매우 격노한 얼굴로 표정이 바뀌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복권에 당첨되는 일이야 있을 수도 없을 만큼의 적은 확률이니 당연히
농담으로 한 소리로 받아들여야 할텐데

식구들은 매우 어이없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잠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본분을 망각하는 발언을 했다는 후회가 들었고,
동시에 농담도 때와 장소를 가려서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질나쁜 농담은 되도록 피하고 농담을 할 때도 확률을 계산해서
가능한 농담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 저런 생각을 하는중에

어이없는 표정들로 나를 쳐다보며 침묵하고 있던 식구들 틈에서
누나가 작은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그럼 우리가 널 한국에 보내줄 줄 알았니?”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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