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셋 여자 한 분

턱수염

아하누가 2024. 6. 25. 00:12


 

저녁식사를 마치고 TV앞에 앉으니
작은 녀석 의연이가 매우 즐거운 얼굴로 내 앞에 왔다.
그리고 얼굴을 쓰다듬듯 만지더니 저만치 달아났다.
손으로 내 얼굴을 만져보니

며칠 째 면도를 하지 않아 턱이며 뺨이 까칠까질하다.
그 까칠거림이 재미있었는지 녀석은 저만치 도망갔다가 또 내게 다가온다.
얼른 붙잡아 강제로 얼굴을 부볐다.

심한 따가움 때문에 녀석은 발버둥을 친다.

그리고 멀리 도망가는 듯하더니 내게 다시 다가와
손으로 그 까칠거리는 뺨을 손으로 만지고 달아난다.
그러면 나는 또 붙잡아 얼굴에 뺨을 비비고
녀석은 도망갔다가 다시 다가와 그 뺨을 손으로 만지고 가고....
세 살 정도의 아이가 있는 집에서 아빠와 함께 즐기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범 국민적인 놀이를 나 또한 즐기고 있는 셈이었다.
몇 번의 반복 끝에 녀석은 지루함을 느꼈는지 곧 놀이를 중단했다.
그래도 다른 놀이에 비하면 비교적 오래 재미를 느낀 놀이였다.

 

 

 

 * * *

 

 

 

밤이 깊어 아이들 재우고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다른 일로 내가 사는 동네에 들렀다가 생각나서 전화했다며
지금 집 앞에 와 있다고 했다.
겉옷을 대충 걸치고 아이들 자는 곳에 들러 자리 한번 잡아주고 집을 나섰다.

오랜 친구다.

 


12시가 넘은 시간에 집 앞에 왔으니 달리 할 일이 없어
편의점에서 커피 한 잔씩 사고 동네 골목길에 멀뚱멀뚱 서있었다.
거리는 제법 추웠고 술도 안 마시는 두 사람이 딱히 할 일은 없어
큰길에 간판이 보이는 PC방에 갔다.
그냥 서로 빈둥거리며 이 얘기 저 얘기하며
이것저것 둘러보는데 갑자기 밝아진 장소에서 친구는 나를 보고 깜짝 놀란다.

 

 

"야, 너 뺨에 그게 뭐니?"
"......?"

 

 

얼른 거울을 보고 나니 아까 저녁 나절에 있었던 일이 비로소 생각났다.
의연이 녀석은 까칠거리는 느낌 때문에 내 뺨을 만진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서야 집을 나오기 전 녀석에게 이불을 덮어줄 때
녀석의 손에 꼭 쥐어 있던 빨간색 크레파스가 떠올랐다.
그날밤은 그 꼴로 늦은 시간까지 PC방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제공했다.
그리고 그때서야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린 시절에 있었던
어머니의 명언이 떠올랐다.

 

'자식이 아니라 웬수여 웬수....'

 


집에 들어와 얼굴을 씻었는데도 잘 지워지지 않는다.

귀찮아서 그냥 자기로 했다.
그리고 녀석이 꼭 쥐고 있는 크레파스를 파란색으로 바꾸어 주었다.
아빠 얼굴이 빨갛게 된 것이 자기 때문이라는 미안함은 들지 않을게다.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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