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셋 여자 한 분

이웃집 아이 승연이

아하누가 2024. 6. 24. 01:36



오후에 후연이 노래자랑이 있었다.
유치원에서 매년 하는 이 행사는 커다란 행사가 아니라
단지 사람들 앞에 서서

자신의 재능을 발표하는 연습을 하기 위함이라는 설명인데,
그 부분은 참 마음에 든다.
누가 더 잘하냐는 경쟁 개념은 혼자서 잘하는 것이 아니라
어차피 남들 앞에서 잘해야 잘하는 것으로 인정받는 현대 사회의 구조니
이런 훈련은 바람직할 수도 있다.

 


보호자들은 꽃다발을 사오라기에 2천원 들여 장미 한송이를 예쁘게 만들었다.
사실 이 노래자랑이 벌써 3번째다.
5살 때, 6살 때 그리고 지금이니 이런 무대에는 무대에 서는
주인공만 익숙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관객인 나도 상당히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교육의 목적을 감안하여 꽃다발도 항상 작은 걸로 준비한다.
아이가 소화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으로.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아이들이 받기에 너무도 커다란 꽃다발들을 가져오는데
보기에도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
혹시 우리 후연이가 매년 그 작은 - 친구들중에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작고 초라한 - 꽃다발을 받으며
왜 자신의 것은 친구들의 그것보다 작고 초라하냐는 말을 꺼낼 때를 대비해서
왜 이 꽃이 작아야 하는지

A4 용지 2매 분량의 모범답안을 항상 외우고 있었는데
녀석은 그러한 나의 노력을 미리 눈치 챘는지
아니면 꽃다발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지 아직도 그런 질문을 하진 않는다.

 


교육의 목적이 확고한 행사여서 노래를 잘하는 정도의 차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니
노래자랑 행사는 매년 그렇듯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 * *

 

 


행사를 마치고 교사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한 아이가 문옆에 혼자 서있다. 승연이다.
우리집과 그리 머잖은 곳에 사는 이 아이는 후연이랑 동갑인데
할아버지가 혼자 키운다.
부모는 이혼을 했다고 하는 것 같고

아버지가 있긴 있는데 일하느라 늦는건지
아니면 다른 문제가 있는 건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런 승연이 할아버지는 길거리에서 폐휴지나 폐품을 줍는 일을 한다.
승연이는 가끔 할아버지를 따라다니기도 해서 그 장면을 본적도 있다.
후연이와 같은 일곱 살인데도 승연이는 혼자서 찻길을 건너고
혼자서 유치원과 집을 오간다.
할아버지는 말버릇인지, 아니면 한탄인지 가끔 승연이를 부를 때면
'이년아 저년아'라고 말한다는 얘기를 아내에게 들은 적이 있다.
이게 내가 알고 있는 승연이네 상황이다.
그런 승연이가 출입문 옆에 기대어 서있다.
아내에게 물었다.

 

 

"여보, 쟤 승연이 맞지? 아무도 안왔나봐."

 

 

아무도 없다. 승연이는 혼자 왔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와서 누군가 보호자가 있는 줄 알았는데

혼자 와 있던 것이다.
한복을 교사가 갈아 입혀준다.
일곱 살 짜리가 들기엔 너무도 크게 보이는 쇼핑백에
갈아입은 한복과 받은 선물 등을 구겨 넣는다.
갑자기 머리를 심하게 때리는 궁금증이 생겼다.

 

 

"여보, 쟤 꽃다발은?"

 

 

아내에게 물으니 아내는 힘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는다.
노래하는 후연이는 8번, 승연이는 10번이었다.
나는 후연이 노래하는 걸 비디오로 담느라

뒷번호까지는 신경쓰지 못하고 있었는데
승연이의 노래가 끝나고 아무도 꽃다발을 주지 않은 것을
아내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승연이를 발견한 건 노래자랑이 다 끝난 뒤였고
설령 그전에 승연이를 봤다고 해도 내가 딱히 무언가 준비할 건 없었는데
왜 이리 미안하고 큰 잘못을 했다는 생각이 들까.
분명히 내가 잘못한 것은 없을텐데 왜 이리 미안한 마음이 들까.
특히 아무도 가져다주지 않은 꽃다발 부분을 생각할 때면 더 그렇다.
나는 일부러 교육 삼아 작고 초라한 꽃다발을 준비하지만
그런 꽃다발은 승연이에게는 정말 따뜻하고 값진 꽃다발이 될텐데....

마음은 아프지만 별 방법이 없다.

 


노래자랑을 마치고 승연이 데리고 후연이, 의연이와 맥도날드에 갔다.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지만
그게 뭐 승연이에게 마음의 위안이라도 될까. 어림도 없는 소리지...
그리고 집에 돌아온 지금까지도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승연이에게 더 이상 해줘야 일은 쉽게 보이지 않는다.
그저 내가 우리 아이들을 남들 눈에 안타깝게 보이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과
승연이가 밝고 건강하게 자라길 바래주는 것만 생각났을 뿐이다.
이런 사실이 또한 안타깝다.

 


승연아, 밝고 건강하게 자라거라....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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