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나 천까지 셀 수 있다!"
저녁에 집에 들어오니 큰아들 후연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건넸다.
천까지 센다는 말은 당연히 1부터 1000까지의 숫자를
순서대로 셀 수 있다는 것이고,
스스로 생각해도 그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느끼고 있는 것만 같았다.
후연이가 한 살 두 살 들어가면서 나는 후연이의 언어구사 능력이
내가 영어를 하는 능력과 절묘하게 교차되어가고 있음을 느끼던 터였다.
녀석의 우리말 구사 능력이 조금씩 발달하면
상대적으로 내가 영어로 표현할 수 없는 말까지 하게 되리라는 예상이었다.
그러면서도 아직 녀석의 한국말 실력보다
내 영어실력이 더 뛰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유중 하나는 바로 숫자였다.
적어도 나는 숫자에 있어서는 백이 아니라
만, 십만, 백만까지도 셀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녀석이 숫자도 하루하루 그 능력이 발달하니 신기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이제 나의 영어 표현 능력보다
훨씬 앞서가게 되리라는 섭섭한 느낌도 들었다.
"어디 한번 해봐!"
후연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숫자를 세어나가기 시작했다.
"백, 이백, 삼백, 사백, 오백, 육백, 칠백, 팔백, 처언~ 맞지?"
".....?"
틀리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맞다고 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누구에게 배웠냐고 물으니
당연히 엄마에게 배웠다며 옆에 있는 엄마를 턱으로 가리킨다.
"여보, 그래도 그렇게 가르치면 어떻게.
백 다음에는 백일이라고 해야지."
그러자 아내는 눈을 지긋이 내리 깔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한편으로는 매우 한심하다는 표현으로
또 한편으로는 매우 답답하다는 심정을 담고 있었다.
"아이고, 당신이 뭘 몰라서 그래요. 그럼 당신이 한번 가르쳐봐요."
아내는 뭐가 그리 답답한지 계속 어이없다는 표정만 하고 있었다.
숫자를 가르친다는 것이 뭐가 그리 어렵나.
그냥 순서를 가르치고 그 순서를 적용하는 응용력만 가르치면
아이들은 누구보다 빨리 적응할텐데 말이다.
백 다음이 이백인 경우는 그것이 필요한 특별한 경우에나
그렇게 표현해야 한다.
백 다음에는 백일이 맞다.
"후연아, 그건 그게 아니구. 백 다음에는 백일이야 알았지?
그리고 백일 다음에는 백이가 되는 거고...."
그러다 문득 이 녀석이 일부터 백까지의 숫자를 셀 수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일부터 십까지는 나랑 게임을 하거나 축구를 할 때 스코어를 세기 위해서라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하나부터 백까지 순서대로 셀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고 있지 않았다.
"후연아, 그럼 너 하나부터 백까지 셀 수 있어?"
녀석의 눈빛은 갑자기 초롱초롱해지더니 이내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열하나
열둘
열세
열네
열다섯
열여섯
열일곱
열여덜
열아홉
스물
스물하나
스물둘
스물셋
스물넷
스물다섯
스물여섯
스물여덜 아니, 스물 일곱
스물여덜
스물아홉
서른
서른하나
서른둘
서른세
서른네
서른다서
서른여서
서른일곱
서른여덜
서른아홉
마은
마은하나
마은둘
마은세
마은네
마은다서
마은여서
마은일곱
마은여덜
마은아홉
쉬은
쉬은하나
쉬은둘
쉬은세
쉬은네
쉬은다서
쉬은여서
쉬은일곱
쉬은여덜
쉬은아홉
예순
예순하나
예순둘
예순세
예순네
예순다서
예순여서
예순일곱
예순여덜
예순아홉
이른
이른하나
이른둘
이른세
이른네
이른다서
이른여서
이른일곱
이른여덜
이른아홉
여든
여든하나
여든둘
여든세
여든네
여든다서
여든여서
여든일곱
여든여덜
여든아홉 음......
아흔
아은하나
아은둘
아은세
아은네
아은다섯
아은여섯
아은일곱
아은여덜
아은아홉.......
"백!"
* * *
아내가 왜 그렇게 가르쳤는지 이제 알 것 같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녀석은 시도때도 없이 하나부터 백까지 세겠다고
엄마나 할머니를 따라다녔다. 집요한 녀석......
세상 일에는 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 모양이다.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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