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은 늘 그러는 것처럼
축구를 하고 돌아와 큰 녀석하고 목욕탕에 간다.
딸 없는 엄마들이나 아들 없는 아빠들은 잘 모를 테지만
그 재미 또한 만만치 않다.
요즘은 녀석이 제법 컸다고 제 의사표현을 하니 더 데리고 다니는 맛이 난다.
목욕탕에 가서 하는 프로그램은 이렇다.
일단 대충 씻기고 탕안에 들어간다.
그리고 녀석의 배를 잡고 녀석은 수영선수 흉내를 내면
나는 이 녀석을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옮겨준다.
이것이 녀석이 말하는 수영이다.
그리고 씻기고 나와 평상같은 곳에 놓여진 바둑판을 펼치고
녀석과 바둑을 두는 것으로 환상의 목욕 프로그램은 마무리된다.
7살 녀석이 바둑을 어찌 두겠냐만 내가 늘 바둑 TV에 인터넷 바둑을 하니
바둑판과 바둑돌이 낯설지 않은 모양이라
제법 선과 선의 교차점에 돌을 가지런히 놓을 줄도 안다.
이렇듯 매우 범상한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목욕탕을 찾은 것이 오후 3시경.
순서대로 대충 씻기고 탕안에 들어가 수영을 시키려는데
갑자기 녀석이 내게 말한다.
"아빠, 오줌...."
"그래, 얼른 싸고 오자~"
아이를 일으켜 나가려는데 녀석은 큰소리로 말한다.
"그게 아니라 쌌다구 이히~"
".....!"
그렇다. 녀석은 과감히도 탕안에서 오줌을 싼 것이다.
탕안에 들어와 있던 사람은 우리말고도 두명.
나이 지긋하신 큰형님뻘 되시는 분인데
녀석의 얘기를 알아들은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나는 긴장했다.
그리고 사태를 어떻게든 최소화하려고 매우 노력하고 있었다.
"자. 얼른 나가서 싸자. 여기서 싸면 이놈!~해"
하지만 녀석은 그런 나를 소 닭 보듯 이해못할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목욕탕이 떠나갈 듯한 커다란 목소리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이 안에서 쌌다니깐~"
그냥 아까 들은 말로 흐지부지 마무리했어야 했는데 잠시 당황한 나머지
사태를 조금이라도 축소시키고
가능하면 은폐, 또는 호도시키려는 발상으로 되물은 것이 화근이었다.
탕안에 들어와 있던 두 사람의 표정은 아까보다 더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아까의 말은 못알아 들었을 지도 모른다.
갑자기 더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빠른 머리 회전으로 이 상황을 극복하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제 1안>
일단 두들겨 패서 사태를 크게 번지게 한 다음 탕안에 있던 사람들로부터
'뭐 그럴 것까지야' 또는 '아이들이 다 그렇지요 뭐'라는 소리를 유도한다.
<제 2안>
일단 일어나 큰소리로 사과를 하고 탕안의 물을 다시 재정비한다.
<제 3안>
탕 안에 들어와 있던 사람에게 아이의 오줌이 피부 건강에 효과가 뛰어나다고
되지도 않는 학설을 주장하며 설득시킨다.
<제 4안>
옷 보관함 열쇠를 흉기 삼아 팔목에 대고 '난 사실 에이즈 환자인데
내가 피 흘리는 것보다 아이 오줌이 훨씬 나으니 그냥 참으라'고 협박한다.
<제 5안>
충무로에 찾아 오면 단란주점 미스리를 소개시켜준다고 회유한다.
* * *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생각이 오갔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끔은 사과나 변명보다
그저 아무 말 없이 넘어가는 것이 좋을 때도 있을 것이다.
탕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런 상황을 한두번 겪으랴.
그것이 다 세상 사는 일들이고 또한 경험인데....
녀석에게 목욕탕에서 오줌싸면 안된다고 가르쳤지만
얼마나 알아들을 지 모르겠다.
내일 아침에 물어보고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매일 밤 교육을 시켜야겠다.
그리고 혹시 모를 상황을 생각해서 녀석에게 탕 안에서 오줌을 싸더라도
절대로 남에게 말하지 말라는 교육도 시켜야겠다.
어느덧 녀석도
세상 살아가려면 말못할 일들도 있다는 걸 아는 나이가 된 모양이다.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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