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집에 들어오니 후연이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
무슨 노래인가 했더니
이번주 토요일에 있을 노래자랑에 나갈 연습을 한단다.
작년의 경험을 더듬어 보니 노래자랑이라기보다
어린 아이들이 무대에 올라서서,
또는 사람들 앞에 나서는 연습을 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다.
약간은 숫기 없는 우리 집안 내력 때문에 내심 걱정을 했지만
후연이는 제법 무대에 씩씩하게 올라가 열심히 했다.
많은 걱정이 사라지고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했다.
내가 어렸을 때 그런데 나가면 잘 울었거든.
그리고 노래를 해보라고 몇 번 시키니
녀석은 이제 싫다며 옆으로 드러눕는다.
막 눈물이 날 것 같은 얼굴이다.
옆에 있던 아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한다.
"저러다 막상 그 날 안 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해?"
".....!"
그렇다. 그 날 안 하겠다고 징얼거려도 문제는 문제인 셈이다.
그리고 다시 달래고 얼러서 노래를 시키다 보니 손에 쥔 복사된 악보가 보인다.
"어디 좀 볼까?"
복사된 악보를 보니 F장조로 되어 있는 노래는 후연이가 부르는 것처럼
낮은 음으로 시작되는 노래가 아니다.
앗,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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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잠깐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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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 때 녀석은 씩씩하게 무대에 올라가
객석을 향해 배운대로 인사를 했다.
그리고 피아노 반주가 시작하고 녀석이 노래를 시작했다.
"시냇물은 졸졸졸졸 고기들은 왔다 갔다...." 하는 노랜데,
어디서 크고 씩씩하게 하라는 지도는 받았는지
선생님의 피아노 반주와 전혀 어울리지 않게 소리를 빽빽 지르고 있었다.
목에 핏발이 선 모습이며 벌겋게 상기된 얼굴에
많은 사람들이 바닥을 치며 통곡보다 더 절묘한 표정으로 웃었으며
노래가 마치고 폭발적인 환호가 나오자
그 다음 어린이부터는 노래를 모두 그런식으로 하는
기현상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었다.
나중에 학부형들이 채점한 점수표에서도 상당한 고성적(?)을 올렸다고 한다.
물론 어린 아니여서 1등, 2등 같은 수상은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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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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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나마나 이렇게 연습하다간 지난 번에 그랬던 것처럼
선생님의 반주와 3~4음이 낮거나
높은 음정으로 노래를 할 것이 뻔하다.
명색이 음악매니아요, 집안에 음악가가 있는 집의 장손이
선생님의 피아노 반주와 동떨어진 음정으로 노래를 하는 것을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
그 생각이 떠올라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던 전자 오르간을 꺼내 펼쳤다.
앗, 이게 얼마만에 보는 전자오르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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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다시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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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오르간.
무려 10년전에 단지 감기가 걸렸다는 이유로 거금 60만원을 들여서 구입한 장난감이다.
당시엔 몸에 이상한 증세가 있어 몸살이나 감기만 걸리면
그것을 의학으로 해결하지 않고 사고 싶은 것 사면서 그 재미로 아픈 데를 치유시키는
새로운 의학을 몸소 실천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어느 아픈 날 미친척하고 사두었던 전자오르간인데, 한동안 즐겁게 놀긴 했지만
제 역할을 못하고 집안의 공간만 잡아먹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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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회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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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오르간으로 음정을 잡아주고 이렇게 하는 거라고 몇 번 가르쳐주었지만
이미 깔아둔 멍석에 노래할 의욕을 잃어버린 후연이는
매우 비협조적인 표정과 몸짓으로
애써 아빠의 지도를 거절하고 있었다.
갑자기 불효라는 단어가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이러다가 정말 노래자랑을 보이코트 할까봐 그만 연습을 중단했다.
* * *
하긴 그 놈의 노래가 뭐가 중요하랴.
그리고 남들 앞에서 노래 좀 못하면 어떠랴.
가끔 부모들 욕심에 애가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소리를 듣는데
그것이 내 경우에 해당되는 일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이는 아이답게 자라야 한다.
언젠가 녀석도 어디선가 좋은 모습을 보고 스스로 찾아와
오르간 반주를 해달라고 할지 모른다.
그렇게 하고 싶을 때 해주는 게 맞는 걸테지.
후연아, 노래자랑에서 노래 잘 못해도 좋으니까 지난번처럼 크게 불러. 알았지?
크게 하려면 지난번처럼 해.
그걸 어른들은 화끈하게 한다고 하는데 아무 때나 써먹는 말은 아냐. 알겠지?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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