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셋 여자 한 분

협박

아하누가 2024. 6. 24. 01:19


     


      "여보, 큰애가 뭐라는 지 알아요?"

     


     사무실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을 때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큰 녀석이 또 사고를 친 걸까?
     아내의 목소리로 보아 그것은 아닐 것 같고
     또 뭔가 재미있는 일이 생기고 있는중인 모양이다.

 


     "불어펜 알아요? 그거 사오래요"     
    
    
     불어펜인지 부루펜인지 얇은 판에 잉크를 입으로 불어
     그림을 그리는 도구로,
     케이블 TV 어린이 방송에서 광고를 본적이 있다.

     녀석이 어느새 TV를 보며 상품구매를 할 줄 아는 나이로
     성장한 것은 좋으나 시도때도 없이
     충동구매를 하는 것까지 배우고 있는 모양이다.

 


     "뭔지는 알지만 이 시간에 그걸 어디서 사오라고.
      못 사온다고 얘기 잘해봐"
    
    
     하지만 아내는 극히 평범할 것 만 같은 내 얘기에
     고개를 설레설레 젓듯 난감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아, 글쎄 이 녀석이 그걸 안 사오면 알아서 하라고
      내게 협박하지 뭐예요?"

 


     협박?     
     살다살다 6살 먹은 놈이 불어펜 안 사온다고 협박했다는 얘기는
     처음 들었다. 그렇다면 녀석의 협박 내용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아내는 내게 전화를 했을까.

 

 

     "안 사오면 어떻게 하겠대?" 
     


     그러자 아내는 피식 웃으며 말한다.

 

 

 

     "안 사오면 그냥 자버리겠대요"

     "......?" 
    
                   
     녀석이 협박을 한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그 협박 내용 또한
     대단하다. 불어펜을 안 사오면 그냥 자버리겠다고?

     


     아무래도 자식 교육을 잘못 시킨 것 같다.
     불어펜을 안 사온다면 어렸을 때 하던 것처럼 벽에 머리를
     박는 자해 행동을 하던가, 또는 밥을 안 먹겠다던가 그것도 아니면
     이제 좋은 인질인 동생도 있으니 동생을 인질로 삼아
     의지를 관철시켜야지, 불어펜 안 사오면 그냥 자버리겠다며
     부모에게 귀여움을 받을 짓을 협박이라고 하고 있다니
     분명 이것은 뭐가 잘못 되어도 한참이나 잘못된 것이다. 
     


     협박의 실체를 모를 뿐 아니라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키기 위한
     노력이 부족한 녀석이다. 얼른 집에 들어가서
     제대로 된 협박을 가르쳐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내에게 대충 잘 얘기해보라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사무실 한켠에 있는 소파로 달려가 약 20분을
     데굴데굴 구르며 웃었다. 녀석이 커서 테러리스트가 될 자질은
     조금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또 한번 웃었다.
     어쩌면 아이들의 세계는
     어른이 모르는 또 다른 기준이 있는 지도 모른다.
    
    
                   *      *      *      *
    
    
     9시가 조금 넘어 집에 들어오니 녀석은 깊은 잠에 빠져있다.
     녀석은 자신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음을 알고
     계획한 내용에 대한 실천에 들어간 것이다.
     지독한 녀석. 불어펜 안 사준다고 테러를 감행하다니.

     내일 아침에는 놀이방 가는 길에 '협상' 이란 것을 가르쳐 줘야겠다.
     '불어펜 사주면 일주일간 말을 잘 듣는다' 던가
     또는 '불어펜 사주면 밥에 섞인 콩도 먹겠다'는 그런 협상 말이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하니 나도 좋은 아빠 되기는 틀린 것 같다.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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