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셋 여자 한 분

포도

아하누가 2024. 6. 24. 01:16


    
     아침에 큰아들 후연이가 냉장고를 열더니

     무언가를 꺼내 입으로 슬쩍 가져간다.
     못 먹을 것을 먹고 있는지, 아니면 내가 모르는 맛있는 것이
     냉장고 안에 있었는지 궁금해서 얼른 문을 열어보니
     이제 막 상자에서 꺼낸 듯한 포도 몇 송이가

     맛깔스러운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녀석은 냉장고문을 열어 얼른 한 알을 떼어 입에 넣곤 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왜 날 보고 당황하지? 
     


     다시 냉장고문을 열고 포도를 보니

     그냥 먹기에는 아무래도 정상적인 모습은 아니다.
     아직 농약도 그래도 묻어 있을테니 자라나는 아이에게는
     좋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너무도 명확히 든다. 
     


    "후연아, 포도는 깨끗이 씻어서 먹어야 돼 알았지?"
    
    
     안 씻어서 먹으면 키가 안 큰다고 하려다가
     키가 안 큰다는 협박은 나중에 쓸 일이 많겠다 싶어
     더 중요할 때를 생각해서 애써 간지러운 입을 참고 있었다. 
     


     그런 아침을 보내고 밤늦게 들어오니 모두 꿈나라에 빠져있다.
     조용히 냉장고 문을 여니 아침의 그 포도가 그대로 보인다.
     아침에 한말이 아들 녀석에게 효과가 있었는지 아니면
     포도말고도 더 맛있는 것들이 많았는지

     포도는 아침의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후연이가 그랬던 것처럼 한 알을 떼어 입에 문다. 달다.
     상큼한 뒷맛이 하루의 피로가 물리는 것 같다. 물론 과장이다.          
     하루의 피로가 포도 한알로 풀리면 포도를 송이 채 손에 쥐고
     빵 먹듯 먹는 마누라는 왜 맨날 피곤하다는 소릴 할까.
     그러니 그것은 분명한 거짓말이지만 아무튼 포도 맛은 좋았다. 
     


     본격적으로 자리잡고 한송이를 먹으려고 냉장고에서 꺼내어
     싱크대로 가져왔다. 농약을 잘 씻어야지.
     그러나 불행히도, 매우 불행히도 나는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한번도 포도를 씻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리고 막상 포도를 씻으려니 막막하다. 어떻게 씻어야 할까?
     그렇다고 내가 포도도 씻을 줄 모를 만큼
     가정적이지 않은 사람은 아니다. 
          


     다만 내가 주로 하는 가사는 노동력이 동반된 청소나 짐 옮기는 것,
     그리고 시키는대로 하기만 하면 되는 비교적 단순 노동인 설거지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생물학적 요소도 반영되어 있고
     화학적 지식도 응용해야 하며 많은 경험을 바탕으로 해야 하는
     고난도의 가사에 부딪히게 된 것이다.
     그러니 그 고민은 매우 심각하게 다가왔다.
    
     우선 설거지용 세제를 사용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설거지에 익숙해진 나는 세제가 그리 달갑지 않다.
     어쩌면 세제가 잘 씻기지 않아 그걸 먹게 된다면
     차라리 농약을 먹는 편이 더 몸에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수돗물을 세게 틀고 흐르는 물에 씻어?         
     흐르는 물에 농약이 씻길 리가 있나.
     그리고 흐르는 물이라지만 그 또한 수돗물일 뿐인데
     씻고 나서 휴지로 한알 한알 닦아내던가 아니면
     드라이로 한알 한알 말리기 전에는 수돗물을 직접 먹는 거나
     똑같잖아? 그럼 수돗물 대신 생수로?
    
    
                 *       *      *      *

 

 

    
     나는 잠시의 고민과 연구 끝에 포도로부터 농약을 제거하는데
     몹시 중요한 사실 한가지를 터득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연구결과로 향후 많은 가정과 주부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생활의 지혜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농약과 포도와의 관계를 통해 또 다른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이 또한 나의 뛰어난 응용력의 승리가 가져준 또 하나의 선물인 셈이다.
     변변찮은 이 글을 보시는 분께 고마움의 표시로
     오늘 알게된 중요한 사실 한가지를 전하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포도를 뜨거운 물로 씻으면 더럽게 맛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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