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1학년때였으니 꽤 오래전의 일이다.
당시는 전자오락실이라는 것이 시내 곳곳에 선을 보이게 되었던 시기였는데
마침 광화문 근처에 커다란 오락실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도 주변 친구들이 얘기들을 많이 해서 어느 일요일은 그곳을 찾게 되었다.
친구들과 찾은 그 오락실은 꽤 넓은 공간에
처음 보는 신기한 오락기계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물론 신기하다고 해야
지금의 시각으로보면 조악하기 그지 없는 것이었지만.
대부분의 기계가 전자오락이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한,
다분히 기계적이며 또한 수동적 오락기였고
그나마 사람도 많았고 요금도 비쌌기 때문에 구경이나 하는 정도였다.
이곳 저곳을 둘러보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기계를 만나게 되었는데,
투명한 통에 작은 레코드판이 여러장 들어 있었고
동전을 넣은 뒤 원하는 곡을 지정하면 음악이 흘러나오는 기계였다.
물론 이것이 JUKEBOX라고 불리우는 기계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이 기계를 못 본 사람이 있다면 당장 비디오 대여점에 가서
‘사랑과 영혼’을 빌려보면 알 수 있다.
그 영화는 주인공 남녀가 하라는 도자기는 안굽고
JUKEBOX로 언체인드멜로디를 틀고 엉뚱한 짓 하다가
굽던 도자기나 망가뜨리고
결국 남자 주인공은 귀신이 된다는 내용의 영화인데,
그 장면에서 주크박스를 확인할 수 있다.)
주크박스 앞에서 50원짜리 동전을 넣고 무슨 곡을 들을까 잠시 고민을 했다.
하지만 고민도 제대로 된 고민을 해야지,
거기에 있는 음악중에 아는 곡이라곤 한곡밖에 없었으니
그러한 고민은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고나니 또한 허탈해졌다.
당시 유행하던 음악은 디스코음악으로 영화
<SATURDAY NIGHT FEVER>에 삽입된 형제그룹 BEEGEES의 음악이
인기절정을 달리고 있던 시기여서
자연스럽게 유일하게 아는 곡인 <STAIN’ ALIVE>를 선곡하려는데
갑자기 커다란 덩치의 고등학생이 눈앞에 나타났다.
“뭘 들을려고?”
교복에 표시된 학년 표시로 보아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었고
덩치로 보나 말투 및 기타 품행으로 보나
공부도 못할 것처럼 생겨먹은 형이었다.
주로 저런 사람은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낮잠이나 자고,
사라는 참고서는 안 사고 그 돈으로 자장면이나 먹는 못된 유형의 학생이다.
게다가 공부는 못해도 잔머리는 엄청 잘 돌아가서
중학교 1학년의 정신수준으로는 도저히 속일 수도 없는 상대다.
그러니 겨우 중학교 1학년 학생은 고등학생이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이나 해야지 안그러면 그 고등학생은 어떤 사기를 칠지 모른다는
정치적 색깔이 강한 생각을 잠시 한뒤 일단 순순히 대응하기로 했다.
아니, 사실 좀 쫄았었다.
“저… 비지스 노래 들을 건데요?”
“임마! 촌스럽게 비지스는 무슨… 이거나 들어!”
그러면서 그 고등학생은 자기가 원하는 곡을 꾹 눌러버렸다.
FLEETWOOD MAC이라는 그룹의 DREAMS 라는 곡이었는데
알지도 못하는 노래인데다
보기싫은 그 고등학생이 듣기도 싫은 보충설명까지 하고 있어
노래나 사람이나 무척이나 얄밉게 느껴졌다.
더욱이 동전도 내 돈으로 넣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면서부터
나의 불만은 한국 고등학생 전체의 무례함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지고
또한 문교부의 잘못된 정책을 비판하고 있었으며
나아가 유신정권을 손가락질 하고 있었다.
무려 50원이라는 돈을 넣었는데 그에 대한 권리도 이행하지 못한다니
이게 과연 민주국가인가?
아! 조국의 장래가 갑자기 어두워진다.
당시 버스 한번 타는데 드는 돈이 25원이었으니
교통비를 기준으로 1999년의 가격으로 환산해도 버스 요금의 두배,
즉 1,000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중학교 1학년 학생이 생돈 1,000원을 그냥 하늘로 날려 버렸으니
이 얼마나 비분강개할 노릇인가?
그러한 생각들은 참으로 훌륭하고 애국적이었지만 감히 고등학생 앞에서
어찌할 방법이 없었던지라
그나마 본전이나 건지자는 생각으로 흘러나오고 있는 노래를
귀기울여 듣기로 했다.
하지만 노래 또한 밋밋하기 그지 없어서
일정한 박자로 울리는 드럼소리만 들릴뿐 별다른 특색도 없었다.
노래를 하는 여자 목소리는 투박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어울리지 않게 간드러지게 하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하는 것 같아 더 짜증만 나고 있었다.
저런 여자는 아마 음식점에서 값싼 음식을 시켰을 때
주문한 바로 그 테이블 앞에서 주방에 대고 큰 소리로,
그러면서 매우 신경질적으로 음식 이름을 외치는 여자일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결국 본전이 아까와 억지로나마 기분 좋게 들으려는 시도마저 실패하자
모든 희망을 날아가버린 느낌이었다.
그리고는 머리속 어딘가에 그 음악을 오랫동안 기억해 두기로 했다.
음.....플리트우드맥이라...그리고 드림즈....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간간히, 그러나 꾸준히 그 노래를 접하게 되었다.
발매 당시에는 유래가 없던,
최고의 판매량을 기록한 음반을 낸 그룹이라는 것도 알았고
나름대로 뛰어난 음악성을 가진 그룹이라는 사실도
팝송책이나 또는 김기덕 아저씨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그러한 객관적 사실마저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 노래를 듣게 되거나 또는 그 노래에 대한 얘기가 나올 때마다
공부도 더럽게 못하게 생긴 그 고등학생 형과
음식 이름을 신경질적으로 외쳐대는
식당 종업원의 모습을 오버랩시키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 고등학생 형은 무장공비로,
노래를 부르는 여자는 빗자루를 타고 다니는
추악한 마귀할멈으로 업그레이드시켜
노래에 대한 의도적 거부를 더 호전적으로 발전시켰다.
하지만 나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음악은 점점 더 내 귀에 자주 들렸으며
그럴 때마다 알듯 모를 관심으로 더 주의깊게 듣게 되곤 했다.
가끔씩, 아주 가끔씩, 깊고도 잔잔하게 가슴속으로 다가오기도 했으나
그런 감정은 애써 쉽게 잊으려 했다.
그러나 그 이후 이상하리만큼 그 음악은 자주 들려왔다.
* * *
JUKEBOX 사건이 있은지 정확히 20년이 지난 어느 날.
결국 플리트우드맥의 CD를 사고 말았다.
그리고 요즘도 <DREAMS>를 듣는다.
가끔 차에서 나오는 노래를 듣고
기억도 가물거리는 오래전 생각에 혼자 슬그머니 웃으면
옆에 있는 아내는 무슨 생각하며 웃냐고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다그치곤 한다.
그럴 땐 대개 대꾸도 않고 생각에 잠긴다.
갑자기 옛날의 그 고등학생 형의 모습이 몹시 지성적으로 느껴진다.
무척 공부를 잘해서 지금쯤 어디선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님이 되어 있을 것만 같다.
노래를 부른 여가수의 목소리도 빗자루를 타고 다니는 마귀할멈이 아니라
무척 친근한 누나같은 목소리로 어느덧 변해있었다.
그때 더불어 생각나던 식당종업원도
지금쯤은 커다란 식당의 주인이 되어 있을 것만 같다.
잊혀지지 않는 노래,
그리고 오랜 시간 잔잔한 감동으로 남아있는 노래 <DREAMS>.
난 오늘도 <DREAMS>를 듣는다.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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