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TV에서 젊은 댄스그룹을 본 적이 있다.
여성 싱어가 있는 3인조 혼성 그룹인데 젊은층에 꽤 인기가 많은 그룹이었다.
인터뷰중에 여성 싱어가
자신이 지금 군대에서 제일 인기있는 여자 연예인이라는
말을 들었다며 멋적게 웃는 모습을 보았다.
얼핏 들으면 별 것도 아닐 것 같은 이 말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이유는
내가 평소에 세대차이를 느낄 수 있는 여러 형태의 모습중
가장 확연하게 나타나는 차이가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라 늘 생각하고 있던 터였기 때문이다.
* * *
내가 군에 막 입대했을 때 TV를 통해 볼 수 있었던 최고의 스타는
민해경, 정수라 등이었다.
어느덧 지금은 가요무대에나 나올 것 같은 이 가수들도
한 때는 섹시함을 맘껏 뽐내며 브라운관을 누빌 때가 있었다.
물론 그 가수들 말고도 나미라던가, 경우는 좀 다르지만
주현미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군인들에게 어필하는 여가수의 매력이란
한계가 분명히 있기 마련이어서 가창력이나 독특한 개성을 앞세운
여가수들은 이미 경쟁력이 떨어지는 상태였고
몸을 좀 유난히 많이 흔든다거나 또는 복장이 조금 요란스러우면
일단 군인들의 기호에 딱 맞아 떨어지는 가수가 될 수 있었다.
따라서 군인들의 시각으로 보는 인기의 척도는 일반인들의 기준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으며
또한 이 사실은 향후 군인이 미혼 여성들의 원하는 배우자 순위에
하위권을 굳건히 지키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아무튼 민해경과 정수라 등이 군인들에게 인기정상을 달리고 있었는데
대략 일년쯤 지났을 무렵 한 가수가 혜성처럼 나타나
우리부대는 물론 육해공 3군 군부대,
심지어 방위병까지도 광란의 도가니로 만들게 된다.
그 여가수는 바로 김완선으로 잘 빠진 몸매와 관능적인 춤,
그리고 특유의 뇌쇄적인 눈빛으로 대한민국 군대의 전투력을 60%나 저하시키는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한다.
어찌하여 군인들의 전투력이 60%나 저하되는지 그에 대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 TV를 보며 발생하는 심한 타액 분출로 인한 탈수증 환자 급증
- 근무 때문에 TV를 못본 고참 사병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쫄병의 심리적 사기저하
- 무슨 이유인지 그 다음날 아침 다리가 달달 떨린다는 몇 사병의 체력저하
- 김완선이 TV에 나오는 순간을 위해 내무반 지붕 위에서 안테나를 잡고 있어야 하는
쫄병의 분노에 찬 설움
- 김완선이 지금 TV에 나오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벌어지는 경계병들의 근무 태만
이같은 이유로 군인들의 전투력은 급속도로 저하되었으며
몇 년 뒤 이 사실을 알게 된
김완선은 심한 자책감에 빠져 가요계를 은퇴한다는 폭탄선언을 하고
대만으로 잠적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대단한 김완선이었지만 그런 사실 또한 내게, 또는 나와 같은 시기를
군에서 청춘을 보낸 몇 동년배들에게 국한된 얘기일 뿐이다.
* * *
요즘은 인터넷에는 많은 동호회들이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어
가끔 동호회 모임에 참석하게 된다.
사이버에서 세상에서 맺어진 인연이라 그런지
나이나 사회적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
하지만 나이의 구성이 제각각이다 보니
가끔씩 대화중에 세대차이를 불쑥 느끼게 되는 말들이 나오게 된다.
그때마다 일일이 나이를 물어보기도 곤란해서
나는 항상 그런 경우에 이런 질문을 하곤 한다.
"군에 있을 때 누가 제일 인기 있었어요?"
역시 대답은 제각각이다.
강수지였다는 사람, '비비'였다는 사람, 엄정화였다는 사람......
오직 취향은 존재하지 않고 당시의 시대적 상황만 증명해주니
이야 말로 얼마나 정확한 세대의 구별 방법인가.
또한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현실과 분단의 아픔을
한번에 느끼게 할 수 있는 것이니 참으로 적절한 방법이 아닐 수 없다.
요즘 군인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
아마도 S.E.S나 핑클, 베이비복스 등이 압도적으로 인기를 끌지 않을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요즘 군인들은 좋을 것 같다.
한두명도 아니고 집단으로 나와 즐겁게 해주니 말이다.
이런 요즘 군인들한테 내가 겪었던 '김완선 신드롬'에 대해 열변을 토하면
아마도 그 얘기 자체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을 것이다.
정말이지 김완선 신드롬은 그 당시 군인들에게 있어서 만큼은
대단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런 얘기는 세대를 함께 하지 않은 사람이면 알 수가 없게 마련이다.
이해 못할 사람들에게 말하기보다는 차라리 가만히 입다물고 있다가
같은 세대들을 만나 박장대소하며 수다를 떠는 편이 정신건강에 더 나을 것 같다.
어디 모여서 이 얘기 마무리 지을 분 안 계시나?
아하누가
이 글을 쓰고 나서야 나보다 윗세대들에게도
김추자라는 무시무시한 영향력을 가진 가수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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