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칼럼

고 김수환 추기경의 일화

아하누가 2024. 6. 20. 00:30


 


유머 중에는 이런 형식의 유머도 있다.
유머의 주인공이 평소에 가지고 있던 강한 캐릭터와

정반대의 이미지를 보여줌으로써 웃음을 유발하는 형식이다.
한때 유행했던 최불암 시리즈가 그런 형식의 대표적인 유머다.
이 시대의 아버지요 이 시대의 어른이라는 뚜렷한 이미지를 가진 최불암이
그답지 않은 엉뚱한 얘기를 하는 것이 이 유머의 핵심인데,
거기에는 최불암이라는 강렬한 이미지가 전제되어

듣는 이들을 더욱 웃기게 한다.
(하지만 이것은 최불암이라는 배우가 실제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니고

그의 이미지를 이용해서 많은 사람들이 유머를 즐긴 것이니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유머들과는 사뭇 다르다.)

 


실제의 상황에 있어서도 근엄한 정치인이나 행정관료 또는
유머라고는 모를 것 같은 고지식한 선생님이 농담을 하면
그것은 다른 사람의 유머보다 훨씬 더 우습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또한 그것은 그 사람의 평소 인격과 품성이 잘 담겨져 있는 유머들로서
단순한 말장난에 그치지 않는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한동안 인기리에 방영되던 TV프로그램인
도올 김용옥 교수의 ‘논어 이야기’라는 프로가 있었다.
논어를 현대 감각으로 독특하게 해석하는 한편 거침없는 화술과 위트로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언젠가 그 프로그램의 특별 초청 강사로 김수환 추기경이 출연한 적이 있다.
그 방송에 출연하여 언뜻 언뜻 도올의 장단에 맞추어 농담을 하는
추기경의 모습은 보는 사람들을 매우 즐겁게 했다.
이 시대의 양심일 수도 있고 이 시대의 존경받는 인물 중에도

손가락안에 꼽히는 추기경이 농담을 하니 이 또한 매우 신선하고 유쾌하다.
잠시 한 장면을 살펴보자.

 

 

김 추기경이 ‘인과 사람을 통해

죽음의 문화를 생명의 문화로 바꿔야 한다’고 말할 즈음
도올이 질문을 던졌다.

 

 

“끊임없이 선행을 하고 살아도 왜곡·질시에 시달리게 되는데
이러한 인간관계의 문제를 믿음으로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추기경이 답했다.

 

“아직 예순이 안되셨나요?”

 

 

도올이 50은 넘고 아직 60은 안되었다고 답하자 추기경은 말했다.

 

“이순(耳順)을 넘기면 껄끄러운 소리나 질시는

모두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의 폭소와 박수가 이어졌다.
이 이야기는 얼핏 들으면 그리 유머러스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왜 그 순간에 많은 사람들이 환하게 웃었으며

또한 박수가 나왔냐면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TV를 통해 도올의 강의를 들은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가끔 도올 나름대로의 해석을 역설하곤 하는데,
바로 도올이 강의한 내용중에 ‘이순이란 것은 귀가 순해진다기 보다
그때쯤 되면 세상의 나쁜 이야기들은 듣지 말라고

일부러 귀가 어두어지게 되는 것’이라는
해석으로 많은 호응을 받았었다.

바로 그 부분을 그 표현 그대로 추기경이 도올에게 그대로 전해주니
이 또한 매우 유쾌한 일이 아닌가.

추기경의 유머 감각도 돋보이고

또한 추기경이 직접 유머를 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던 기억이다.

 


여기서 잠깐 유머로서의 감각을 분석하기 전에 살펴봐야 하는 것이 있다.
위의 유머는 자칫 잘못 해석하면 남을 핀잔하는 내용이 될 수 있고
아니면 남을 비하하거나 비꼬는 유머가 될 수 있다.
적어도 문맥만으로 보자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유머다.
하지만 유머라는 것은 그 내용과 감각도 중요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유머를 한 상황과 유머를 하는 사람의 품성이다.


거친 말 잘하기로 소문난 도올도

그 강의에서는 추기경에게 한껏 예의를 표했고
추기경 또한 평소 그 모습처럼 온화한 모습을 보였다.
남의 행동을 비꼰다거나 핀잔을 주는 분위기가 아니었음은
강의에 참석한 사람이나 이 장면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모두 공감하고 있었다.
그러한 모습은 전파를 타고 시청자들에게 자세히 전해졌으며
따라서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사람들 또한

추기경의 미소처럼 온화한 웃음을 짓게 되었다.

 

 

유머는 그저 단순히 유머로서 존재하는 것만은 아니다.
유머를 표현하는 표정과 말투에 그 사람의 품성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좋은 유머를 구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좋은 품성을 가지는 것이다.

 

 

       *          *          *

 

 

그런 추기경이 2002년초 어느 일간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멋진 유머를 보인다.
인터뷰가 끝날 즈음 추기경은

 ‘올해는 내가 출마합니다. 기호 1번입니다.’ 라고 말해
기자를 잠시 긴장시켰다.


그리고 놀란 표정의 기자에게 추기경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 지역구는 천국(天國)입니다.”

 

대통령 선거와 지방자치 단체장 선거 등
굵직 굵직한 선거들이 예정되어 있는 해의 1월에 들려준

추기경의 덕담이 아닌 유머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선거에 나서는 사람들이 이 보도를 보았다면

뭔가 느끼는 점이 많았을 것이다.
좋은 덕을 쌓은 사람은 유머를 함에 있어서도 교훈을 주는 모양이다.

 

 

 

 

 

 

 

 

아하누가

이 글을 쓸 때는 생존해계셨지만 추기경은 지금은 고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