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트웨인이 어떤 책을 빌리려고 이웃집에 갔다.
이웃 사람은 마크 트웨인에게 유머 섞인 말투로 말했다.
"빌려드리고 말고요. 얼마든지 보십시오.
그러나 한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여기서 보시라는 겁니다.
책은 서재 밖으로 절대로 내보내지 않기로 했거든요"
며칠후 그 사람은 트웨인에게 잔디 깎는 기계를 빌리러 왔다.
익살꾼 트웨인은 상냥하게 말했다.
"빌려드리고 말고요. 얼마든지 쓰십시오.
그러나 한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여기서 쓰시라는 겁니다.
절대로 집 밖으로는 그걸 내보내지 않기로 했거든요"
* * *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인쇄소 견습공과 수로 안내인, 신문기자와 편집자 등을 지냈다.
이러한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톰소오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 등을 발표해
미국 문학에 큰 영향을 끼친 작가다.
또한 그는 작가일 뿐만 아니라 유머를 좋아하기로 소문난 사람이다.
미국의 케네디센터에서는 이러한 마크 트웨인의 유머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98년 마크 트웨인 상을 지정,
뛰어난 유머를 보인 코미디언을 대상으로 시상해왔다.
그 동안 리처드 프라이어, 조나단 윈터스, 칼 라이너 등이 수상했으며
최근 수상자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미국 여배우 우피 골드버그다.
자신의 이름을 딴 상이 있는 걸 보니
마크 트웨인의 유머 감각도 대단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서두에 제시한 유머는 듣기에 별로 유쾌하지 않다.
저런 유형의 유머는 유명인의 일화에 주로 등장하는 형식으로,
대화 상대에게 멋진 응답과 반박을 통해
이를 읽는 사람들에게 통쾌함을 느끼게 하는 형식이다.
따라서 저 말이 멋진 유머가 되려면
일단 상대방의 캐릭터가 매우 비굴해야 하고
또한 매우 나쁜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상대방이 먼저 잘못을 했다는 공감이 확실하게 형성되어야
통쾌함이 적용되는 형식의 유머다.
네거티브적인 요소를 바탕으로 웃음을 자아내는 유머는 바람직하지 않다.
누군가 피해를 입는 사람이 유머 속에 등장하기 때문이며 또한
그러한 네거티브적 주제는 유머를 듣는 사람도 왠지 모를 어색함에
자연스러운 웃음을 잃은 채 형식적인 웃음만 짓게 된다.
조롱과 멸시, 비난 등의 의미가 유머의 목적으로 쓰인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유머다.
웃음이 웃음답지 않고 웃음이 부자연스러울 때 우리의 스트레스는 더욱 쌓인다.
가장 자연스러운 것 만이 가슴을 터놓고 활짝 웃을 수 있는 것이니
유머는 언제나 유머다와야 한다.
비슷한 유형의 유머를 한번 더 살펴볼까?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엠마뉴엘 칸트는 혼자 살았지만
미적 감각이 뛰어났다.
그래서 입고 다니는 옷 맵시도 매우 뛰어났다.
그러던 그가 어느 만찬장에서 입고 있던 옷소매가 터지는 일을 당하고 말았다.
만찬장을 빠져나올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할 수 없이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그것을 본 친구가 터진 옷 소매를 빤히 쳐다보며 은근히 농담을 했다.
“이보게 칸트, 자네의 학식은 여기서도 얼굴을 내미는가 보군”
그러자 칸트는 친구를 바라보며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가? 용케도 발견했네. 그런데 그곳을 어느 멍청함이 들여다 보고 있군”
이 이야기는 주인공이 칸트이다 보니 아무래도 칸트의 시각에서 멋진 반박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이런 유머는 유쾌하지 않다.
반박을 받는 상대가 만인의 적이거나 인류의 중죄자였다면 모를까
지금의 이런 상황이라면 통쾌한 유머는 아니다.
이야기만으로 볼 때 상대가 멍청이 소리를 들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설령 평소에 나쁜 감정이 있다 하더라도 그런 식의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그리고 그 정도의 유머 감각은 별로 뛰어나지도 않으며
유머 감각이라기 보다는 그저 고약한 성격일 뿐이다.
차라리 칸트의 터진 옷소매를 보고 그렇게 표현한
친구의 유머 감각이 더 뛰어나다.
가끔 우리는 주변에서 멋진 농담을 들을 때 가만히 듣지 못하고
꼭 그것을 되받아치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본다.
상대의 말에 공감을 하면서도 지기 싫어하는 승부욕 때문인지 어떻게 해서든
그 말에 흠을 잡고 반박을 하고 핀잔을 주려는 사람을 본다.
그것은 건강하지 못한 일이다.
유머는 유머로서 받아들일 줄 알고, 유머를 유머로서 웃을 줄 아는 사람이
진짜 유머를 알고 즐기는 사람이다.
남을 핀잔주는 일을 유머 감각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남의 유머를 즐겁게 받아들일 줄도 아는 것이 진정한 유머다.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보자.
영국의 극작가이며 평론가인 버나드 쇼가 자신을 비판하는 비평가들을 골려주고 싶어
자신을 비평하는 비평가 중 로댕을 싫어하는 사람들만 초대했다.
그리고 그는 한 작품을 보여주면서 말했다.
“최근에 구한 로댕의 작품인데 평가를 좀 해주시지요?”
로댕을 싫어하는 평론가, 그리고 버나드 쇼를 싫어하는 평론가에게
좋은 평이 나올 리는 없는 일. 평론가들은 그 작품을 매우 혹독하게 비평했다.
그러자 그 말을 듣고 있던 버나드 쇼는 큰일이 났다는 듯 황급히 말했다.
“아, 이게 이제보니 미켈란젤로 작품인데 내가 잘못 보여주고 있었네. 참나....”
그러자 평론가들은 무안해져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버나드 쇼의 유머 감각도 제법 뛰어난 편이다.
하지만 이 일화 또한 그의 유머 감각이 빛났다기 보다는
일화 전반의 분위기가 그리 밝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매우 치욕스럽고 언짢은 유머인 셈이다.
다시 마크 트웨인의 유머를 한번 더 살펴보자.
마크 트웨인이 어느날 신문기자로부터
미국 국회의원의 도덕성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사회풍자에 뛰어난 그는 망설임없이 말했다.
“국회의원 아무개는 개자식이다”
며칠후 일간지에는 이말이 여과없이 그대로 기사화되었고 미국 국회는 소란스러웠다.
마침내 의회에서는 마크 트웨인에게 사실 여부를 밝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잘못을 인정하는 성명문을 발표하라고 그를 압박했다.
그러자 마크 트웨인은 <뉴욕 타임즈>에 다음과 같은 성명문을 발표했다.
“얼마전 내가 한 말은 타당하지도 않고 사실에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오늘 성명을 통해 다음과 같이 정정한다.
‘미국 국회의 아무개는 개자식이 아니다.’”
발상 자체는 몹시 뛰어나다. 대단하다.
저 정도의 발상을 가진 사람이니
주변에서 그의 유머 감각을 높이 평가했음직한 대목이다.
하지만 유머의 뉘앙스가 그리 즐겁지 않다.
마크 트웨인이 정말 그랬는지 안그랬는지,
아니면 그 미국 국회의원이 정말 개자식이었는지
개자식이 아닌지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유머로 인해 또 다른 적을 만들고 있는중이다.
유머로 인해 또 다른 적이 생긴다면 그 유머는 하지 않느니만 못하다.
유머는 어디까지나 건강해야 한다.
단순히 말의 유희가 아니라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모두 건강한 웃음을 지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유머를 잘하는 유일한 방법이요 또한 정확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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