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2월 19일.
영국에 있는 진보과학협회라는 단체에서 1만여 개의 유머를 놓고
전세계 70개국 10만명 이상이 참가한 인터넷 투표를 통해
최고의 유머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어느 정도 공신력이 있는 기관인지는 모르지만 발상 자체는 참으로 신선하다.
1만여 개의 유머를 발췌한 것도 그렇고
그것을 인터넷 투표를 통해 최고의 작품을 찾았다니
'진보과학협회'라는 화려한 이름과는 그리 어울리지는 않은 일이기도 하다.
아마도 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단체는 아닌 모양이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선정된 최고의 유머는 우리나라에서도 명탐정으로 잘 알려진
셜록 홈즈의 에피소드가 47%의 지지로 최고 유머로 결정되었다.
그럼 세계 최고 유머로 뽑힌 영국의 전설적인 탐정 셜록 홈즈의 일화를 볼까.
홈즈와 워트슨이 캠핑을 가서 텐트를 치고 야영을 했는데
한밤중에 홈즈가 워트슨을 깨우면서 이렇게 물었다.
홈즈 : 워트슨, 자네 별을 보게나. 무슨 생각이 나나?
워트슨 : 나는 수백 만개의 별을 보고 있어. 이 중에는 지구와 같은 행성들도 있을 거야.
지구와 같은 행성이 있다면 생명체도 있을지 모르지.
홈즈 : 워트슨, 자네는 바보로구먼! 누군가 텐트를 훔쳐갔단 말이야.
* * *
이 내용이다.
짧은 대화에서 느껴지는 허무맹랑한 내용,
그리고 텐트가 없어져서 별이 보이는 것이라는
축약된 내용을 반전시킨 부분이 유머로서의 충분한 자격은 가지고 있다.
또한 글이 짧으면서도 피식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는
대화에 등장하는 인물이
홈즈와 와트슨이라는, 이미 선명한 캐릭터를 가진 사람들이므로
앞뒤 설명이 필요없게 되니 가능한 얘기다.
물론 홈즈가 정말 그런 대화를 했다는 것은 아니다.
홈즈와 워트슨의 명성과 캐릭터를 빌어 누군가 만들어 낸 유머다.
하긴 주인공들 또한 실존 인물이 아니니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이 유머가 별로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에 대한 순서를 바꿔 상대를 웃기는 인과전도식의 유머는
우리에게 너무 친숙해져서인지 저것이 왜 세계 최고의 유머라고 떠드는지
공감이 가지 않는다.
차라리 같은 방식의 유머라면 우리나라의 최불암 아저씨 얘기가
더 재미있고, 유치한 듯하나 순발력이 돋보이는 삼행시, 사행시 시리즈가
유머로서 그 가치는 더욱 뛰어나다.
하지만 저 유머가 세계 최고의 유머라고 발표한 배경에는
그럴만한 이유도 있다.
* * *
별로 재미있어 보이지 않는 저 평범한 이야기가
세계 최고의 유머로 선정된 과정에는
조사기관 및 발표기관이 영국이라는 데에 그 이유가 있다.
영국의 작가 코난 도일이 만든 셜록 홈즈의 추리소설은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진 명작이다.
특히 영국 내에 있어서 홈즈의 인기는
다른 나라의 경우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대단하다.
홈즈 시리즈의 마지막 편에 해당하는 글에서
홈즈가 마치 죽은 것처럼 사라지자
각 유명 신문의 부고란에 실리기도 했고,
'셜록키언'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낼 만큼
그 책을 성경책 이상으로 보고 연구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상당히 많이 있다는 것이다.
즉 소설속의 인물들에게 실제 인격을 부여하여
실존인물처럼 추앙하고 있는 것이 영국 내의 분위기다.
이 정도 상황이라면 영국 사람들이 가지는 홈즈의 애착은 대단한 것이고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세계 최고의 유머에 홈즈가 등장하는 것도
애교있는 애정 표현이 아닐까.
나라마다 특징이 있고 국민마다 성격이 다르니 좋아하는 유머 스타일도
나라마다 다른 모양이다.
그래서 유머는 사회의 척도라 하지 않는가.
상황이 이러니 세계 최고의 유머가 재미있느니 또는 시시하니 하는 말들은
별로 의미가 없다.
다만 그런 조사를 했다는 것(정말 했는지 안했는지 또한
알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런 보도가 우리나라 신문까지 늠름하게 발표되도록
홍보한다는 점들이
유머를 좋아하고 아끼는 한사람으로서 매우 부러울 따름이다.
우리의 신문들은 남의 나라 이야기는 재미있는 듯 보도를 하면서
우리나라에서 유머 모임에서 올해 최고의 유머를 뽑았다고 보도요청을 하면
소가 닭 보듯 아무 생각없는 눈빛으로 쳐다볼 것이다.
그게 어디 보도 뿐이랴.
우리의 경직된 사회적 관습으로 볼 때 유머나 농담 등 관료적인 시각으로의
점잖치 못한 일들은 어디서든 좋은 대접 못 받았으니 말이다.
그동안 사회는 직장에서 농담 잘 하고 잘 웃는 사람들을 경솔하거나
안이한 자세로 일하는 것으로 과소평가해 왔다.
성공이나 출세를 하려면
가급적 웃음이나 농담을 억제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아직도 사회 전반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풍부한 유머 감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매사에 능률적이며
대인관계가 원만한 경우가 많다.
오히려 이런 장점을 살릴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어
유머가 유머로서 인정받고
또한 상황에 걸맞는 농담 한마디는
더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게 되길 기대해 본다.
끝으로-
우리나라에도 그런 조사를 하면 어떨까?
정말 조사를 한번 해보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궁금해진다.
우리나라 국민들의 유머에 대한 감각과 상식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다.
그리고 그런 터무니 없는 듯한 상상속에는 혹시나 본인의 졸작
<텔레토비와 국회의원이 공통점>이 뽑히면 좋겠다는
앙증맞은 상상도 곁들여 본다.
아마 언젠가는 그런 조사를 하게 될 것이다.
사회가 아무리 변해도 유머는 끝까지 존재할 테니까.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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