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얘기 한마디가 길고 장황한 설명보다 명쾌하게
의미를 전달할 경우가 있다.
그 짧은 말 중에는 통쾌한 풍자도 있고 신랄한 비유도 있게 마련인데
그중에서 ‘유머’라는 것을 빼면 비유도 풍자도 싱거워진다.
세상 돌아가는 일이야말로 그런 말로 표현하기에는 더없이 좋아
많은 사람들이 그런 표현을 하고 있는 요즘이다.
특히 요즘은 어느 신문을 봐도 <한마디>라는 - 이름은 각기 달라도 성격은 같은 -
코너가 있어 사회적으로 인지도 높은 사람들의 얘기를 재미있게 다루고 있다.
하지만 불행히도 신문에 나올 만큼 유명한 인사의 유머 감각은 형편없으며
또한 매우 경직되어 있다.
그래서 신랄해야 할 풍자와 비평이 어색하게 받아들여진다.
예를 들어보자.
2001년 8월 14일자 어느 일간지에 실린 내용이다.
“자는 사람 깨워 수면제 먹이는 쓸 데 없는 일을 즉각 중단하라”
어느 정당의 부대변인의 말이다.
이 말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얘기는 집집마다 TV가 두 대나 있고,
인터넷 보급률이 세계 1,2위를 다투는 나라에서
야당과 여당은 대규모 장외집회를
그만두라는 의미를 담고자 한 말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그게 제대로 된 표현일까?
자는 사람을 깨워 수면제를 먹이고 다시 재운다는 유머는
이미 30년전에 유행했다.
내가 그 유머를 처음 들은 때가 1970년대 초반으로 고영수, 장고웅 등이 나오던
TV프로그램을 통해서 들었으니 상당히 오래된 얘기다.
오래 되었다고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가져다주는 의미는
아이러니컬한, 의미없는 의미 말고는 없다.
한마디로 그냥 웃자고 지어낸 애기다.
그러니 인터넷을 비롯한 미디어의 뛰어난 환경 아래 벌어지려는
원시적인 장외집회를 비꼬기 위한 비교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차라리 ‘아직도 삐삐로 연락을 주고 받는 식’라던가, 그것도 아니면
‘남들은 초고속 인터넷망을 쓰는데 모뎀을 사용는 격’이라는 비유가
더 어울린다.
첨단 사회와 더불어 시민들의 인식이 변해가는데
정치는 아직도 부질없는 짓을 하려한다는 내용을 말하려 했다고
신문기사에 부연되어 있는데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그것이라면
‘자는 사람 깨워 수면제 먹이는’ 표현은 더더욱 어울리지 않는다.
또한 그 표현이 하지 않아도 되는 쓸데없는 일에 대한 비유였다면
그것 또한 핵심을 잘못 집었다.
단순히 쓸데없는 짓을 비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왜 쓸데없는 짓인가에 대한 비유를 적절히 표현했어야 했다.
웃기려면 제대로 웃기고 비유를 하려면 통쾌하게 하자.
이런 상황은 아직도 이 나라에서 제일 발전하지 못한 것은 정치 분야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비유나 유머는 제대로 사용해야 한다.
그 밑의 기사를 한번 보자.
“신사(紳士)답게 신사(神社)참배를 완전히 포기하라”
어느 정당 대변인의 논평중에 나온 이 말은 당시 주변 국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사참배를 강행하려는 고이즈미 총리가 정말 신사참배를 한다면
고(孤)이즈미가 될 것임을 경고하는 의미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건 제대로 된 표현일까?
불행히도 그건 아니다. 일단 말장난으로 일관했다.
신사를 동음이의어로 표현하려는 시도는 나름대로 기특하나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일본인을 신사(紳士)라고 전제하면서 무슨 경고성 발언이 되나?
결국 우리는 일본을 신사라고 인정하는 꼴이 아닌가?
말장난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
뒷부분을 보니 고이츠미 총리의 이름을 가지고 유머러스하게 표현한다고
고(孤)이츠미라고 했는데,
고(故)이츠미라고 차마 하지 못하고 다른 한문을 쓴 걸 보니
그야말로 새가슴이다.
그렇게 상대를 의식하고 있으면서 무슨 풍자가 되고 경고가 되나.
멀쩡히 산사람을 차마 죽었다고 표현할 수가 없었다면
그런 유머는 차라리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것도 좋다.
하지만 그 대변인은 또 하나 큰 실수를 했다. 정말 돌이킬 수 없을 큰 실수다.
일본 총리의 신사참배 같은 민족 정서적으로 중요하며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를
섣불리 유머러스한 표현으로 다루려 했다는 점이 그것이다.
유머는 써야 할 때가 있고 참아야 할 때가 있다.
그 경우라면 차라리 강경하고 비장한 어조로 경고하는 것이 훨씬 좋다.
일본 총리가 신사참배를 하려 한다는 사실을
비아냥으로만 끝난 채 넘어가려는 건가?
도대체 언제 유머를 써야 하는지 언제 참아야 하는지 그것부터 구분을 못하면서
어줍잖은 유머를 구사하려니 전하고자 하는 의미가 안 통하는 것이다.
하긴, 그게 그 사람 탓만은 아니다.
경직된 사회에서 점잖고 체면지키는 일을 최우선으로 알고 지냈던
관념 때문이다.
그러니 유머가 필요하지 않은 상황에서 유머가 나오고,
겨우 나온 유머가 경직되어 있으니 분위기가 썰렁해질 수밖에.
유머를 즐기는 한사람으로서 유머를 즐기려는 이 땅의 분위기는
너무도 경직되어 있다.
아직 2차적 성격을 완성중인 자라나는 우리의 청소년들은
하고 싶은 말을 명확하게 하고
명확하게 핵심을 집어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는
환경이 되었으면 한다.
유머는 살아가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처세술이다.
아하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