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재학중일 때 무언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신선한 자극을 찾아 다닌 일이 있었다.
그래서 당시 1년 선배이던 재훈형과 만나
이것 저것 구상을 하다가 만들어 낸 일이
고등학생 역사에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사이비종교를 만드는 일이었다.
곧바로 착수에 들어간 나는 재훈형을 교주로 앉히고
종교 이름과 교리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우선 교단의 이름은 간단하면서도 약간은 촌스러운 이름으로 하기로 하고
여러 이름을 검토한 끝에
가장 토속적이면서도 촌스러운 이름, 바로 ‘칠성교’라 하였다.
그리고 교단의 역사도 만들었는데 지금 기억하는 주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 옛날 북두칠성의 정기를 받고 이땅에 내려온
천작 성하님의 419대손이 지금의 교주이다.
천작 성하님은 예로부터 3계명을 만들어
온인류에게 평화를 누리게 하신다는 내용이며,
그 3계명이란 이런 내용이었다.
1. 칠성교에 충성하자
2. 교주님께 충성하자
3. 헌금을 꼬박꼬박 내자
그것말고도 교칙이라든가 관습, 의식, 전통 등
여러가지를 모두 작성했었다.
그후 며칠간 교주인 재훈이 형과 부교주를 맡은 나는
교세확장을 위해서 분주하게 움직였으나
이미 약을데로 약아진 고등학생을 상대로 선교활동(?)을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어서
겨우 한명을 포섭하는데 머물고 있었다.
그것도 그에게 세계 평신도 회장이라는 어마어마한 직함을 줘서 달랜 결과였다.
그러던 어느날 교주인 재훈형은
이러다가는 더 이상 교세를 확장할 수 없겠다는 비장한 말을 남기고
무언가 극약조치를 취하려는 것 같은 행동을 암시하고는 곧 사라졌다.
이튿날 아침 칠성교 교주인 재훈형은 얼굴이 팅팅 붓고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어버린
일그러진 얼굴로 다리 또한 절룩거리며 내 앞에 나타났다.
무슨 일이냐 물으니 나를 쳐다보던 밤탱이 같은 눈이 더 일그러졌다.
교주인 재훈형은 교세확장을 위해
더 이상 고등학생의 포섭은 힘들다고 판단,
미술시간에 운동장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던
같은 학원재단의 국민학생(지금의 초등학생)들을 포섭하다가
그 이름도 무시무시한 ‘깜씨’라는 체육선생에게 들켜
개패듯이 얻어터지고 돌아왔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터지면서도 부교주 이름은 말하지 않았다니
싸가지는 제법 있는 교주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칠성교의 교세는 급격히 하락했으며
여신도도 없고 헌금도 한번 못 거둔 채 막을 내리고 말았다.
스스로 돌아보아도 나는 참 대단한 고등학생이었음이 틀림없다.
남들이 공부하거나 미팅하거나 쌈질하러 다닐 때,
나는 그렇게 놀고 있었으니 말이다.
지금 재훈형은 L백화점에서 일한다.
* * *
이제 올해만 지나면 2000년이 된다. 벌써부터 ‘밀레니엄’이라는 이름으로
갖은 상업적인 홍보문구가 판을 치고 있고
그로 인해 파생되는 전산처리에 대한 문제에
모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하지만 나는 가장 걱정되는 문제가 있다.
바로 세기말의 혼돈과 약한 심성을 이용한 ‘사이비 종교’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이비 종교들이 올 한해를 어지럽힐 것인가?
아마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많은 사이비 종교들이 판을 치고 다닐 것이다.
사이비 종교는 두말 할 것 없이 나쁘다.
그리고 서기 2000년이 된다고 갑자기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오늘 떠 올랐던 태양이 내일 또한 떠오르는 것처럼
1999년의 마지막 날에 떠오른 태양이나 2000년의 첫 태양 또한 같은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사이비종교의 유혹에 빠져들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땅의 사이비종교는 ‘칠성교’ 하나만으로 충분하다.
아하누가
14년전 글인데, 유치하지만 그래도 나름 세상 보는 격식을 갖추려고 했었는 듯^^
2024년 현재, 재훈형은 정년퇴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