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솜씨가 남보다 뛰어나지는 않지만 그래도 글을 쓰는 일에 있어서는
남들보다 관심이 많은 편이다.
하지만 매번 글을 쓰고 나서 느끼는 것은 바로 문학이라는 단어와의 갈등이다.
내가 좋아서 쓰는 글이라곤 하지만 내가 쓰는 글은 문학의 기준으로 볼 때
과연 무엇인지 늘 궁금해지곤 한다.
한편으로는 '감히' 문학의 이름으로 내가 쓰는 조잡한 글을 접근시킬 수는 없고
그렇다면 내가 쓰는 글은 단지 '낙서'밖에 되지 않으니
쓰면서도 왠지 고민거리가 되더라는 얘기다.
어차피 스스로의 감성과 정신적 만족을 위해 쓰는 글이니 낙서면 어떻고
문학이면 또 어떠랴 생각은 하지만 그런 생각의 끝은 오히려
스스로를 비하시키는 것으로 결론지어져 그 생각을 꺼낼 때마다 늘 개운치가 않다.
그렇다고 기존의 작가들처럼 미려하고 감수성 가득한 글을 쓸 자신도 없고
그럴만한 자질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러니 항상 내가 쓰는 글은 조잡한 감상이요 부질없는 사고의 나열이 되더라는 것이다.
잡다한 낙서도 똑같은 글이라고 자문자답하지만 그럴수록 문학이라는 묘한 벽은
언제나 내게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겨주곤 했다.
그렇다고 굳이 문학이라는 것과 친해지려는 생각도 없다.
자주는 아니지만 그런 생각을 가끔 하곤 했는데
어느날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읽은 신문 기사가 나름대로 그 해답을
찾아준 것 같다.
작가 한수산 씨와 일본작가 쓰시마 유코 씨와의 대담을 통해
비로소 내 갈등에 대한 의문의 정답을 확인한 셈이다.
쓰시마〓
문학보다는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다는 ‘욕구’가 늘어난 것 아닐까요.
‘야오이 소설’이라고 아세요? 요즘 일본 젊은 세대가 쓰는 소설입니다.
특징은 ‘야마(山)가 없다. 오찌(落)가 없다.
이미(意味)가 없다’ 즉 클라이맥스도 없고, 엔딩도 없고 의미도 없는 소설 형태입니다.
매일매일 친구의 일기를 읽거나, 수다를 떨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책들입니다.
이것도 문학인가 생각하지만 내놓고 말했다간 ‘할머니’라고 욕할 테니….
그러나 저는 소설의 미래에 대하여 낙관적입니다.
변형은 있을 수 있겠지만, 이야기를 읽는 것을 좋아한다는 그 인간의 본질은
결코 변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합니다.
어떤 형태가 될지는 모르지만 ‘언어를 가지고 표현한 이야기’라는 형식으로서
문학은 그 마지막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잘하면 10년쯤 지나 나도 노벨문학상 수상자 후보에 낄지도 모르겠다.
이런 일 가지고 갑자기 즐거워지는 걸 보니 주변에서 변태라고 놀릴만하다.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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