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기억은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아하누가 2024. 7. 7. 00:14



   어느 오후. 전철을 타고 어디론가 가는 중이었다.    

   이미 겨울의 찬 기운은 그 힘을 소진하여 햇살은 점점 더 강한 힘으로    

   아직 남아 있는 찬 가운을 녹이고 있다.    

   전철이 지하 구간을 지나 지상으로 올라가니    

   그 따사로운 햇빛이 차창을 통해 뒤통수를 때린다.    

   마침 전철안에는 사람이 거의 없어 그 따사로움이 공간적인 넉넉함과 어울려    

   봄의 기운을 흠뻑 느끼게 한다.    

   이럴 때는 두 팔을 서로 꼭 끼고 고개를 숙인 채 한가로운 낮잠을 즐기는 것도 좋지만   

   드물게 겪는 넉넉한 공간적 매력에 달콤한 낮잠의 유혹을 의식적으로 거부하고    

   신문을 넓게 펼쳤다. 

   

 

   사람이 많지 않은 전철안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저마다 앉아 있는 자세 그대로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또는    

   각자의 목적지까지 그 모습으로 앉아있을 태세였다.    

   그 때 누군가 앞자리에 앉은 여자가 내릴 것처럼 일어나더니 출입문 쪽으로 향하지 않고  

   내 옆자리에 앉았다.    

   넉넉한 전철 안에서 그가 자리를 굳이 내 옆으로 옮길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옆자리에 앉는 순간 언뜻 눈빛이 마주쳤고    

   나는 그가 10년전 내가 일하던 회사에서 같이 일했던 옛 동료 여직원이었다는 기억이    

   또렷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여자는 그런 또렷한 기억을 확인했다는 사실을    

   내 표정에서 읽지 못했는지 시끄러운 기차 소리 틈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남에게는 들리지 않고 내게는 조금이라도 정확하게 들리게 하려고    

   옆에 바짝 다가앉아 말을 건넸다.    

   

   "저는 아무개라고 하는데요. 혹시 저를 아시지 않나요?"   

   

   나는 그가 누군지 안다.    

   이름도 정확히 기억나고 같이 일했던 기억도 또렷하다.    

   다만 그가 근무기간이 너무 짧았고 말수가 적은데다 나와는 일하는 부서가 달라    

   많은 대화를 할 수 없었던 사람이었다.    

   딱히 나쁜 사이였을 리는 없지만 그렇다고 딱히 시간 내서 일부러 생각할 만한    

   애틋함이 없는 사이라는 것이 김빠질 뿐이었다.    

   

   "알아요. 무슨 무슨 회사에서 같이 근무했지요. 한 10년 되었나요?"   

   

   

   그가 내게 질문을 하자마자 한 호흡의 공백도 없이 바로 대답했지만    

   그 짧은 공백에서도 나는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10년전 동료를 지하철에서 우연히 만난다.    

   그 사람은 10년전에는 별 관심없이 지켜보던 사람이다.    

   그러나 상대는 나의 생각과는 달리 10년전에 관심이 많았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한 감정은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으나 불현듯 오래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쳐가고 감정 또한 순식간에 예전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오랜 기억을 서로 되살리다가 어느 한 역에서 함께 내려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차를 마신다. 

   

   TV 드라마라면 분명히 이렇게 스토리가 진행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그 짧은 틈에서 해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이 스토리가 진행되기 위해 

   필연적으로 있어야 하는 우연한 만남이라면    

   제법 그 배경이 잘 갖추어져 있는 편이었다. 

      

   

   "아~ 맞아! 맞아요. 그랬지요?"  

   

   

   나는 그가 알면서도 일부러 그렇게 대꾸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계속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10년전 동료라면 지금은 아이 엄마가 되어 있으리라는,    

   매우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신분과 상황에 대한 갈등이 아니라    

   다만 지금의 이 상황을 되도록이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해석하려는 나의 노력에    

   걸림돌이 될 것만 같은 질문의 뉘앙스에 대한 불안한 느낌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보통의 경우, 그리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상황이 진행되어야 하는 경우라면 주인공인 여자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에게    

   '나는 누구인데 나를 알지 않느냐'고 묻지 않는다.    

   호기심을 잔뜩 유발하는 의도적인 질문인 '나 누군지 아세요'나 또는 

  '절 기억하세요?'로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된 스토리가 된다. 

   

   그런데 그는 내가 원하는 그런 뉘앙스의 질문이 아니라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스토리가 흘러감을 암시하는 범상치 않은 질문으로    

   그가 말문을 열었다는 사실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가 아니라 나는 누구인데 혹시 내가 너를 아느냐라는 물음은    

   달라도 크게 다르다.    

   그것은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스토리가 진행된다는 복선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쩌면 이 여자가 의도적으로    

   진부하고 상투적인 표현은 피했을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야 TV드라마의 한 장면이 된다.    

   TV드라마라는 것은 모든 것이 일상의 경우를 소재로 한다지 않은가?    

   그러니 내가 사는 내 주변의 배경에서도 드라마와 똑같은 일이 생겨야 당연한 일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내가 배용준이 아니고    

   상대가 송혜교가 아니라는 것뿐이어야 한다.   

   

   

   그러나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잠시후 그는 자신이 내려야 하는 역이라며 자리를 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연락처를 알려주지 않고 그가 내게 연락처를 묻지 않은 것으로 보아   

   예상했던 대로 그는 단지 자신의 지나친 궁금증의 해갈에 대한 욕구로 인해    

   설령 모를 지도 모르는 남자 옆으로 자리를 옮기는 용기가 생긴 것뿐이었다.    

   나는 안다. 생각이 날 듯 말 듯한 답답함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가를.    

   그리고 그러한 사실과 더불어 확실하게 느껴지는 또 다른 현실은    

   지금의 이 상황은 TV 드라마가 아니었고 나 또한 드라마의 주인공이 아니었다는    

   쑥스런 사실이었다. 

   

   잠시 머리만 복잡해진 오후의 망상이었다. 

   

   

   * * *

   

   

   그가 내리고 나는 아까 보려던 신문을 마저 펼쳐 들었다.    

   햇살은 조금 전과 변함 없이 뒤통수를 따갑게 내리 쬔다.    

   잠시 후 전철은 내가 내려야 할 역에 도착했다.    

   이 전철에서 내리면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은 새까맣게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다만 기억나는 것은 TV 드라마는 항상 거짓말을 한다는 오랜 인식만 

   더 또렷해질 것이다.       

 

   

   전철에서 내리니 전철은 요란한 굉음을 내면 내 몸 뒤로 멀어져 간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기억이 그 기차 한구석에 버려진 채 사라지고 있다.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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