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예비군 훈련에 갔었다. 대충 어림잡아도 10년은 넘은 것 같다.
당시만 해도 예비군이란
모든 주책과 푼수, 꼬장, 주정 등 악의 대명사였으며
'예비군복만 입으면 모든 사람이 개가 된다' 라는
유명한 속담을 만들어 낼 정도의 추잡함이 남아있던 시기였다.
몇 번의 입소 훈련 경험을 통해 추석 전에 치러지는 예비군 훈련을
가장 알뜰하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이 책을 읽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훈련소로 들어가기 전날
책 다섯권을 챙겨 4박5일간의 훈련을 떠났다.
그때만 해도 훈련도 심한 훈련도 없어
낮에는 나무 그늘에 앉아 쉬는 것이 고작이었고
아는 사람도 많지 않아 조용히 하품만 하면 되는 훈련이었다.
낮 시간 동안 좋은 곳을 찾아다니며 책을 읽고 밤이 되어 내무반에 들어와
침상에 엎드려 책을 꺼내어 펼쳤다.
그런 내 모습을 본 같은 내무반 동료들도 저마다 가방에서 책 한권씩 꺼내더니
같은 모습으로 바닥에 엎드려 책을 보기 시작했다.
한 두 사람이 그러니 그 숫자는 서 너 사람으로 늘어가고
책을 안 보는 사람은 뭔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슬그머니 밖으로 나갔다.
그때 가져간 책은 이문열 소설도 있었고 김종성 추리소설도 있었고
영어회화책 등 비교적 다양했다.
몇 명의 사람이 이동하고 나서 내무반은 조용히 책을 보는 분위기로 바뀌었으며
국내 예비군 사상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얼마 시간이 지났을 무렵
동네에 사는 초등학교 동창이 내가 있는 내무반으로 찾아왔다.
"어라? 여기 왜 이래?"
다들 책을 읽고 있는 고요한 정적을 깨는 녀석의 말을 그러했다.
"어? 왔냐? 조용히 좀 해라. 분위기 안 보이냐?"
친구는 계속 이해가 안간다는 표정으로 우리 내무반을 둘러봤고
급기야 내손을 잡아 엎으려 있는 나를 일으키더니 자신이 자리잡고 있는
내무반으로 데려갔다.
친구의 내무반은 그야 말로 가관이었다.
대충 6~7팀으로 나뉘어진 고스톱 팀과 서너 파트로 나뉘어진 술팀이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큰 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또한 이들이 피워대는 담배 연기는 이미 내무반을 연막으로 물들였으며
숨쉬기도 어려운 실내 공기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상황이 이러니 친구가 우리 내무반을 보고 놀랄 수밖에.
아마도 몇 번의 이동을 통해 누구의 지시 없이 마음 맞고 목적이 같은 끼리끼리
한곳으로 몰린 모양이다.
다시 내무반에 돌아와 책을 읽고 있는데 예비군 부대 중대장이 들어왔다.
흠찟 놀란다.
그리고는 매우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여러분! 이러시면 안됩니다. 술 안 마시나요?
아니면 제가 뭐 잘못한 거 있습니까?
제가 한잔 사겠습니다. 여러분. 얼른 정신 차리세요"
상식으로 해석되지 않으면 자신이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되게 마련이다.
그 훈련에서 무척 많은 책을 봤다.
가져간 다섯권은 물론이고
나중에 옆사람과 바꿔본 책까지 매우 많은 책을 읽었다.
대한민국 성인 일년에 책을 10권 정도 본다는 데
한번에 일년치를 다 본 셈이다.
정말 여유롭고 한가로운 시간...... 언제 그런 한가로운 마음으로 책을 볼 수 있을까.
* * * *
요즘 아내가 회사의 진급시험이 있다며 밤 10시면 TV를 끄고 엎드려 책을 본다.
TV를 끄니 나 또한 할 일이 없어
예전에 덮어두었던 책을 다시 꺼내어 같이 엎드렸다.
그러니 아들 후연이는 돌아가는 상황을 감지했는지
자신의 동화책을 가져와 읽어달란 말도 없이 혼자서 한자 한자 읽고 있다.
식구들이 방바닥에 엎드려 동시다발적으로 책을 보고 있으니 분위기가 새롭다.
그래서 부모의 행동은 아이들의 가장 좋은 스승이라던가?
요즘은 기분이 좋다.
책을 읽는 것만 해도 상쾌해지는데 온식구들이 밤마다 모여
책을 읽으니(물론 아내는 공부겠지만)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이제 볼만큼 봤으니 TV문화에서도 벗어나야겠다.
어제도 교보문고에 가서 책을 두권 샀으니 오늘밤도 행복하겠다.
아하누가
2013년. 요즘은 책을 읽기가 참 힘든 시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