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회에서나 사건의 발단은 아주 작은 일로부터 시작되기 마련이다.
저녁 식사를 마친 육군 어느 부대의 내무반. 한쪽 구석에서 장난삼아 팔씨름 대회가 열렸다.
대회라 할 것도 없이 너도 나도 만만한 놈 붙잡고 단순한 힘겨루기를 하는중이었다.
남보다 특히 힘이 세지도 약하지도 않은 김병장은 잔뜩 호기를 부리며
커다란 덩치를 가진 부대 고참인 일명 ‘백곰’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아무 일에도 쓸데가 없는 것 같은 그 간단한 일이 사건의 발단을 만들었으니.....
잠시 후 부대내 의무실.
김병장은 한쪽 팔로 다른 한쪽 팔을 부축하듯 감싸안은 채
군의관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이리저리 상태를 살펴본 군의관은 이내 밝지 않은 표정을 짓더니
담담한 목소리로 위생병에게 지시했다.
“어이, 이병장, 이 친구 하루나 이틀 정도 입실시켜!”
입실......
군인에게 있어 이 단어는 천국으로 가는 승차권을 손에 쥔 기분과 다를 바 없다.
제 아무리 천국이 좋다한들 군대 의무실에서 빈둥대는 것보다 좋으랴.
하늘을 나는 듯한 설레임에 김병장은 얼른 내무반으로 달려가
입실에 필요한 보고를 마친 후 덮고 잘 이불이며 옷가지를 들고 서둘러 나왔다.
고참 몇명이 팔씨름 하다가 입실한 놈은 처음 봤다고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뒤통수를 따갑게 했지만
그런 말들은 천국으로 가는 발걸음을 더욱 가볍게 해줄 뿐이었다.
“충성! 육군병장 김병장 19XX년 3월 22일부로 의무실 입실을 명 받았습니다”
신고를 마친 김병장은 우렁찬 목소리가 환자치고는 지나치게 당당했다는 생각이 들어
얼른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그리고 천국같은 의무실을 행복한 눈길로 둘러보니
그곳에는 같은 중대 고참인 박병장이 몸을 모포에 기댄 채
신고하는 김병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박병장님도 여기 계시네요? 언제 오셨습니까?”
늘씬한 반라의 여자 사진이 잔뜩 있는 잡지책을 들쳐보던 박병장은 쑥스러운 듯
보던 잡지책을 뒷편으로 아무렇게나 쑤셔넣고는
이내 환자다운 불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몸살 기운이 좀 있는데 그냥 입실하라네. 그리고 네 얘기는 들었다.
팔씨름하다가 인대를 다쳤다며? 멍청한 녀석....”
“헤헤...그게 그렇게 되었네요...”
김병장은 환자로서의 병명이 다른 환자에 비해
중환자의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꼈는지
다소 수그러드는 말투로 말꼬리를 흐렸다.
의무실에 가려면 병명도 멋져야 한다.
제일 좋은 것이 골절같은 병으로 깁스를 한다거나 최소한 붕대로 몸 어딘가를
칭칭 동여매고 있어 환자답게 보이는 곳이 군대의 특성이다.
치질이나 위장병의 경우 본인은 괴롭지만 주변에서 보기엔 일단 신체적으로
멀쩡하게 보이기 때문에 내부적으로는 신체적 고통으로,
외부적으로는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으로 인해 정신적 고통마저 감수해야 했으니
병명이나 그 종류는 몹시 중요했다.
잠시 그런 생각으로 멋적어 하는 김병장에게 박병장은 아직 남은 이야기를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여기 있어서 좋다만 이게 언제까지 가려나.
아마 김병장이나 나나 입실할 정도는 아닌데
중대로 돌아가면 삽질하고 근무나가며 고생할까봐
여기서 하루정도 쉬게 해주려는 걸꺼야. 그건 너도 알지?”
잠시 행복에 빠져있던 김병장에게 고참인 박병장의 얘기는
실로 청천벽력같은 소리였다.
물론 의무실에 몇날 몇일을 계속 머무를 수는 없겠지만
이제 막 천국의 문에 들어선 김병장에게
이러한 현실적 논평은 날벼락 같은 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 * *
그날 밤 김병장은 의무실 환자 및 위생병들이 잠에 빠진 깊은 밤을 이용해
밖으로 나왔다.
아직 3월의 날씨는 한밤중에는 견디기 힘든 추위가 계속되고 있었다.
물끄러미 어딘가를 응시한던 김병장은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고
막사 앞에 설치된 평행봉으로 뛰어 올라갔다.
평행봉.
이것은 몸통의 무게와 중력을 이용하여 체력을 단련시키는 운동기구지만
힘을 주어야 하는 인대에 부상을 입은 김병장에게는 독약과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하루라도 더 의무실에 있어야 하는 김병장에게
독약은 충분히 먹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독약이 아니라 행복과 평안을 가져다 주는 달콤한 유혹이었다.
하나 둘 세엣.....
김병장은 평행봉에 힘껏 매달렸다.
이미 정상이 아닌 한쪽 팔에 심한 통증이 왔다.
그렇다고 평행봉 위에서 힘이 빠지면 더 큰 상처를 입게 된다는 생각에
김병장은 젖먹던 힘을 다해 평행봉에 매달리고 있었다.
이 정도의 정신력과 노력으로 올림픽에 나가면 러시아 선수나 중국 선수도
쉽게 물리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고 지금은 의무실에 하루라도 더 머물러야 하는 김병장은
이내 날카로운 이성으로 돌아가 매달려있는 평행봉에만 열중하기로 했다.
밤.
모두가 잠든 깊은 밤. 김병장은 자리에 누웠다.
평행봉의 여파가 아직 남아 있는지 팔을 통증은 점점 심해지고 머리는 온통
식은 땀에 젖어 있었다.
가끔은 크게 그리고 가끔은 아주 작은 소리로 자신도 모르는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꿈과 현실을 구별하지 못해 정신없던 김병장의 머리에
누군가의 손이 닿았다. 아픔과 싸우고 있는 중에도 김병장은 저 손길이
밤에 환자의 상태를 점검하는 위생병의 손이라는 걸 알고 매우 흡족했다.
잘 하면 하루는 더 버틸 수 있으리라는 희망찬 기대에
김병장은 아픔도 잊을 것 같았다.
그렇게 그렇게 군대의 하루는 지나가고 있었다.
* * *
“이봐 위생병, 지난 밤에 환자들 상태는 어땠나?”
아침 점호를 마치고 자리에 앉은 군의관이 의무실내 위생병에게 물었다.
“예...뭐 별일은 없습니다만 3중대 김병장과 박병장이
고열과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그래? 거 이상한 일이군. 잠깐 오라고 하지”
김병장과 박병장을 진찰한 군의관은 평소의 차분한 성격답게 이번에도 역시
덤덤한 표정으로 위생병을 불렀다.
“이 친구들 하루 더 있어야겠는 걸. 중대에 보고 좀 해주게”
군의관의 지시에 김병장은
또 한번 천국으로 가는 티킷을 손에 쥐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이번에는 이미 천국에 가서 할 수 있는
3가지 놀이기구의 입장권이라도 손에 쥔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박병장에게 물었다.
“박병장님 감기가 심한 모양입니다”
“그러게 말야. 낮엔 괜찮은데 밤에는 견디기가 힘드네”
“그래요? 저도 그래요. 낮에는 그런대로 괜찮고 밤에는 아프고....”
“원래 군대에서 아프면 다 그런거야”
며칠 일찍 군에 입대했다는 단 한가지 이유만으로
마치 인생을 다산 도사처럼 말하는
박병장의 말투가 좋은 느낌을 주진 않았지만
그래도 하루를 더 머물 수 있다는게 어디냐는 기분에
애써 나쁜 기분은 쉽게 잊으려 했다.
하릴없이 하루종일 빈둥거린 김병장. 의미없는 하루가 지나가겠지만
김병장에게 이런 하루는 천국의 하루와 다를 게 없다.
식사 때면 식당에 가서 여유있게 밥먹고 중대원들이 모두 훈련나가면
조용한 막사 앞에 앉아 따뜻한 햇볕도 쬐고 ....
다만 중대원들과 얼굴이 마주칠 때
환자다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어야 하는 것이 고역이었지만
지금의 이 행복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의 노력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당찬 각오여서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날밤.
모두가 깊이 잠든 밤 김병장은 또 의무실을 빠져나와 평행봉으로 갔다.
그리고 한숨을 길게 내쉰후 평행봉으로 힘차게 뛰어 올라갔다.
몸을 앞으로 뒤로 몇번 흔드니
전날 연습한 효과가 있는지 제법 힘차게 잘 흔들렸다.
기분이 좋은 나머지 몇번 힘차게 몸을 움직이던 김병장은
갑자기 하늘이 깜깜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
아파야 할 팔이 아프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일은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다. 팔이 아파야 한다.
두손을 머리에 대고 고통스런 표정을 짓던 김병장.
고개를 잠시 들고 어딘가를 바라보더니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급한 몸짓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역기가 있는 곳으로 갔다.
역기.......
이것은 올림픽에 금메달이 걸린 종목이기도 하면서
상체와 하체의 근육을 고루 발달시켜주는 아주 힘든 운동이다.
특히 누워서 드는 역기는 상체에만 그 힘이 집중되므로
많은 힘과 순발력을 필요로 하는 운동이다.
역기로 운동하는 장소에 드러누운 김병장.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치던 역기대에 누워
김병장은 있는 힘껏 역기를 들었다.
역기를 든 두팔이 힘에 겨워 몹시 떨리면서 전날의 아픔이 다시 밀려왔다.
그 짜릿함은 고통의 짜릿함으로 그리고 한편으론
잊었던 고통을 다시 찾은 기쁨의 짜릿함으로 김병장의 가슴에 밀려왔다.
아직 쌀쌀한 3월의 밤. 김병장은 고통과 희열이 교차되는 야릇한 감정으로
그 추운밤을 보내고 있었다.
* * *
“예. 김병장하고 박병장이 간밤에 또 심하게 앓았습니다”
위생병의 보고를 받은 군의관의 표정이 다소 찌뿌려진다.
의사로서의 의학적 책임과 장교로서의 군사적 책임이 교차되는듯 군의관의 표정은
몹시 괴로웠다. 하지만 아픈 환자에게 달리 방법은 없는 법.
군의관은 박병장과 김병장의 상태를 살펴보고는
하루 더 의무실에 있을 것을 지시했다.
또 한번의 천국행을 보장받은 김병장. 고생끝에 낙이 온다는 속담이
이런 경우에 어울리는 지 잠깐 생각했지만
그것은 생각할수록 도덕적이고 반인륜적인 문제로 접어들게 되므로
하던 생각을 억지로 중지하고 주어진 천국행 티켓을 마음껏 누리기로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 오늘밤에는 어떤 방법을 해야 하는지
나름대로 심각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 방법은 신중하게 선택해야 덜 아프고 오래 버틸 수 있었으므로
고민을 하는 김병장은 몹시 심각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멍청하게 오래 해?”
언제 곁으로 왔는지 고참 박병장이 말을 건넸다.
김병장은 벌써 3일째 감기 몸살로 의무실에 자리잡고 있는
박병장이 눈에 거슬렸다.
일단 감기 몸살로 입실하는 경우도 드물었지만
특히 3일씩이나 버티고 있는 일은 정말 보기 힘든 일이었고
또한 같은 중대원이다보니 한사람 빠져나간 것도 미안하고 염치없는데
또 한사람이 병 같지 않은 병으로 의무실에서 죽치고 있다는 사실이
마치 눈엣가시처럼 느껴지고 있던 터였다.
“박병장님도 꽤 오래 가네요? 심한 모양이죠?”
“그러게.....”
잠시 말꼬리를 흐리는 박병장의 말투가 왠지 어색하다고 느꼈으나
그것은 그 다음 일이고
김병장의 머리엔 온통 오늘밤에 실시할 하드트레이닝에 대한
계획을 세우기도 급급한 상태라 달리 남 생각을 할 여유는 없었다.
* * *
그날밤.
하루 종일 생각했으나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한 김병장.
그저 전날과 전전날의 기세를 살려 두가지 종목을 완벽하게 섭렵하고자
평행봉에 뛰어 올랐다.
이틀만에 김병장의 실력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실력과
다를 바 없는 평행봉의 고수가 되었다.
얼른 자리를 옮긴 김병장.
역기를 힘껏 들어올렸으나 역기가 무거워서 힘이 들었지
팔이 아파서 힘이 들지는 않았다. 아무리 힘을 주어도 팔은 아프지 않고
다만 역기가 가지는 무게를 이기지 못해 들지 못할 뿐이었다.
지난 밤의 기억을 되살려서 그런 통증이 나타나야 하는데도
불행인지 다행인지 전날과 같은 통증은 김병장에게 나타나지 않았다.
마치 전투에서 패한 것 같은 슬픔이 밀려왔지만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는 일.
김병장은 자신이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유일한 선택임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제 천국에서의 행복은 이것으로 끝이다.
내일부터는 남들처럼 훈련에 참여하고 보초 근무에 참여해야 한다.
며칠간 의무실에서 땡땡 놀았다고 생각한 고참들은 더 괴롭힐 것이다.
의무실에서 막 나온 환자답게 아픈 표정도 적절히 지어야 하고
또한 지나치게 행복했다는 표정도 보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니
김병장은 긴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세상의 일이란 순리대로 흐르는 법.
모든 것을 포기한 김병장은 모두 잠든 의무실에 터벅터벅 들어왔다.
힐끔 주변을 둘러보니 건너편 박병장의 자리가 비어있다.
화장실에 갔을까?
자리에 누운 김병장은 마지막 밤이라도 행복하게 보내고자
모든 잡념은 없애고 편안한 잠자리를 맞기로 했다.
어차피 이런 행복이 그리 오래 갈거라고 생각한 것 아니잖는가?
그리고 눈을 감으니 만사가 편해진다.
내일 일은 내일 일이라는 군인 특유의 단순함으로
돌아가자 김병장의 마음은 더 편해졌다.
이제 천국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려 눈을 감는데
평행봉과 역기를 하며 흘린 땀이
편안한 잠자리를 이루기엔 많은 지장을 주고 있었다.
하지만 때는 아직도 겨울의 한기가 산속 깊숙이 퍼져있는 3월.
세면장에서 찬물로 샤워를 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니
이때가 아니면 언제 한가롭게 이 늦은 시간에 샤워를 할 수 있을까?
김병장은 잠시 고민끝에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천국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을 위한
성스러운 예식을 행하는 성자의 마음으로 수건이며 비누를 주섬주섬 챙겼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최선을 다하겠다는
옛 성현의 명언을 떠올리며 김병장은 너무도 편안한 마음으로 세면장으로 향했다.
이 목욕을 끝으로 이제 모든 일은 예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면 또 흙먼지에 하루종일 뒹굴 것이다.
그리고 훈련과 근무에 지친 채 씻지도 못하고 잠에 빠지는 일이 늘 반복될 것이다.
갑자기 고참 박병장이 부러워졌다. 박병장 역시 김병장이 눈엣가시였을테니....
세면장에 들어선 김병장은 문득 봐서는 안될 것을 보았다.
자신의 노력은 노력도 아니라는 부끄러운 생각도 들었고 이 나라를 이끌어가는
군인의 정신력에 또 한번 감동했다.
고참 박병장은 매일 늦은 밤 세면장에서 찬물로 샤워를 하고 있었다.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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