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과 웃음 사이

영화속의 롤러 스케이터

아하누가 2024. 6. 29. 22:13


 

 

가끔씩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이 어렴풋이 기억날 때가 있다.
그때가 정확히 언제였는지 또는 당시 환경이 어떠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은데
유독 특정한 몇 가지 상황만 기억이 나는 경우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였다. 정말 몇 살 때였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고
대충 초등학교 고학년이 아니었나 싶다.

그때 주말이면 TV에서 오래전 영화를 보여주곤 했다.
아마 제목도 ‘주말의 명화’나 ‘명화극장’이었을 것이다.
영화를 극장에서 접하기에 여러가지로 환경이 어려운 어머니와 아버지께서는
주로 그런 시간을 이용해 영화를 보시곤 하셨다.
가끔 늦은 시간까지 잠들지 않아도 되는 방학에는

나도 덩달아 어머니 아버지 틈에서 영화를 보곤 했다.

그래서 잉글릿드 버그만이니 준 애리슨, 나탈리 우드 같은
배우들의 이름들을 기억하는 것도 그때의 기억이다.

 

 

어느날 주말의 명화를 보는데 영화 시작하기도 전에
어머니께서 그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줄줄이 하신다.

아마 젊은 시절에 보셨던 영화이리라.
내용인 즉, 주인공이 롤러 스케이트를 배우려고 많은 고생을 하다
결국 세계에서 롤러 스케이트를 가장 잘 타는 사람이 된다는

극히 평범한 내용이었다.
다만 어머니 말씀의 핵심은 주인공 역할을 하는 배우가

실제로 롤러 스케이트를 잘 타는 사람이라는 얘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초반 넘어지고 자빠지는 연기를 실감나게 하는데
그것은 정말 그 사람이 실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어눌한 모습의 연기가 가능하다는 말씀이었다.
아마 정말 롤러 스케이트를 못타는 사람이 못타는 연기를 하다간
어딘가 크게 다칠 거라는 친절한 부연 설명도 잊지 않았다.

정말이지 롤러 스케이트를 배우는 그 과정은 어린 내게 배를 잡고 방바닥을 뒹굴며
즐거워하지 않을 수 없는 실감나는 연기였다.
결국 영화의 주인공의 어머니의 말대로 마지막 장면에서

환상적인 롤러 스케이트 뽐낸다.

그때가 언제였는지 영화 제목이 무엇이었는지 전혀 기억에 없고
또한 연기자의 얼굴이나 영화 속 한 장면도 기억나지 않으면서

이 때를 기억하는 이유는 어머니의 그러한 얘기 때문이다.
정말 잘하는 사람만이 못하는 척할 수 있다는 얘기.
어딘가 무협지에서나 나올 법한 선문답적 스토리가 불현듯 떠오른 데는 사연이 있다.

 

 

 * * *

 

 

매주 금요일 늦은 밤에 하는 TV 프로그램에 ‘폭소 클럽’이라는 방송이 있다.
무대에 코미디언들이 나와 그저 그런 내용으로 웃기는 방송인데

거기 등장하는 한 여자가 있다.
리듬 앤 블루스라는 타이틀로 등장하는 이 여자 코메디언은
곱상한 외모와 파티풍의 정장을 하고
마치 머라이어 캐리라도 된 듯 우아한 자태로 노래를 부른다.
근데 그 노래는 리듬 앤 블루스처럼 편곡된 동요들이다.
또한 노래를 잘 부르는 것이 아니라 너무도 어눌하고 억지스런 노래를 열심히 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낸다.

내용은 웃긴데 자세는 진지하고, 분위기는 멋진데 노래는 엉망이니

웃기지 않을 수 없다.
그 엉터리 같은 노래 실력과 분위기에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배꼽을 쥔다.

그러나 그 코너를 재미있게 보는 내 생각은 그게 아니다.
신고은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개그맨이 노래를 못하는 게 아니다.
가수들처럼 뛰어나 가창력이나 테크닉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정확한 박자 감각과 노래에 대한 이해 능력은 매우 뛰어나다는 생각이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그러니까 노래를 그렇듯 엉뚱하고 또 엉터리로 부를 수 있다.
언젠가 그 여자 개그맨이 신고은이 정색하고 부르는 노래를 듣고 싶다만
그거야 지나친 바람이고.

 

 

그러한 사실이 맞는지 틀리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남보다 다른 관점에서 또 남보다 다른 감성에서 무언가를 접할 수 있음이

매우 행복하다.

그리고 나는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보던 제목도 모를 추억의 영화를 떠올린다.
실력이 있다는 것, 그래서 없는 척도 할 수 있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물론 그것이 교만이 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 개그맨의 노래를 들으며 나는 그러한 사실을 새삼 느낀다.


 

 

 

 

 

 

아하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