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인터넷에서 만난 한편의 글-
들국화의 리더 최성원과의 인터뷰인데, 이글에서 나는 평소 궁금하던 여러 의문을 풀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도 이리 명확하게 의문을 풀어주는 질문을 꺼낼 수 있는지,
질문자의 해박한 지식과 센스에 경의를 표합니다.
관심없는 분들에게는 지루한 얘기겠지만
내용이 핵심부분만 있어 이곳에 소개합니다.
* * *
들국화의 브레인, 드디어 입을 열다: 최성원과의 인터뷰(1회)
최지선 fust@dreamwiz.com | edi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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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및 장소: 2003년 2월 26일 PM 2:00 과천 경마장 오리집
질문: 신현준, 최지선
정리: 신현준, 최지선, 송창훈, 김성균
특별 게스트: 김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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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원(1954년 2월 9일생)이 들국화를 '전설적인 그룹'으로 부상시킨 인물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비슷한 시기 들국화와 더불어 '우리노래전시회'라는 프로젝트 음반을 발표해
당시로서는 새로웠던 감성의 음악인들을 선보이는 장을 마련하기도 했다.
후일 몇 장의 솔로 음반을 비롯해 몇몇 가수의 프로듀서로도 활약했다.
(패닉이 대표적일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유명한 인물임에도 그에 대해 알려진 바는 생각보다 많지 않은 듯하다.
많은 기록이 남아있는 들국화에 대해서도 정확하고 자세한 정보는 생각보다 적다.
그 때문일까.
최근 그가 들국화의 카페(http://cafe.daum.net/march)에 손수 '들국화 스토리'를 연재했다.
본 인터뷰에서도 장장 네 시간 이상을 할애하며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들국화를 포함해 자신이 몸담은 과거의 한국 대중음악에 대한 정확하고 상세한 전달이
선배 음악인의 소임이라고 역설하는 듯했다.
그는 인터뷰 내내 형이 동생들에게 말하듯
그 특유의 반말체로 따뜻하고 친근하게 긴 시간 동안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 인터뷰는 분량상 2회로 나누어 연재한다.
1회는 들국화라는 이름을 달고 활동하기 직전 정도까지 정리했다.
이 글에서는 그의 어법을 경어체로 바꾸었기 때문에
최성원 특유의 맛깔스런 어투를 느낄 수 없다.
다감하고 나긋나긋한 '반말'로 바꿔 읽으시길....
또 한 가지. 델리 스파이스 김민규의 참석으로
더욱더 값진 자리가 되었다(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김민규 님의 질문은 전재하지 않고
편집했으며, 그의 질문은 따로 표시했다.
3월 1일 연세대에서 열린 합동 콘서트 연습 때문에 일찍 일어선 관계로,
그의 질문들은 원래 앞부분에 있지만, 내용 흐름상 2부에 편집된 내용도 있다).
이 자리를 빌어 긴 시간 동안 많은 이야기를 해 주신 최성원,
값진 시간을 할애하신 김민규 두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평범해 보였지만 비수를 감추고 있던 젊은 시절
Q: 최근 본인의 성장과정에 대해서는 들국화 다음 카페에 연재한 것을 보았습니다.
성장하는 과정에 대해 그곳에 쓰지 않으신 내용들만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 서울 청운동에 살았고 휘문중·고등학교를 나왔습니다.
(동방의 빛의) 강근식 형의 후배이고 (4월과 5월의) 백순진도 동문입니다.
고려대 물리학과 73학번으로 입학했는데
1년 늦게 들어간 이유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몸이 많이 아파서 한 해를 휴학했기 때문이죠.
Q: 아버지가 최영섭 씨(주: 유명한 가곡 "그리운 금강산"의 작곡자)라는 건
많이 알려졌는데 아버님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는 것 같네요.
혹시 아버님이 '딴따라'를 한다는 사실에 반대는 안하셨는지요?
아버님으로 인해 음악적 영향을 받으신 것은 있으신지요?
- 아버지는 나를 자유방임으로 키우셨어요. 내가 하는 일에는 전혀 간섭하지 않으셨죠.
그래서 피아노를 포함하여 음악을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어요.
아버지가 사 준 기타도 혼자 독학으로 배웠죠.
1980년에 '젊음의 행진'이라는 TV 프로그램에 나갔을 때
내가 피아노를 쳤다고 기억하는 사람이 있던데 아니에요.
피아노를 연주한 사람은 김광민이었고, 나는 통기타를 쳤어요.
건반악기 연주실력은 예전에는 코드 누르는 정도였고
2000년 들국화 공연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치기 시작한 정도죠.
Q: 고등학교 때까지 통기타로 어떤 곡을 주로 연주했나요?
- 나는 평범한 학생이었어요. 고등학교 때 피터 폴 앤 메리, 사이면 앤 가펑클 같은
포크 음악을 즐겨 들었고... 비틀스도 좋아했는데 [Abbey Road] 앨범부터 알았어요.
물론 (김)민기 형의 음악은 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할 수 있어요.
Q: 대학에 들어간 다음에는 생활이 많이 바뀌었을 것 같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놀면서 지내셨는지요?
- 1973년에 대학에 입학했는데 그때 유명한 5인방이 있었어요.
나랑 이상훈(가수 이상열 동생. 뒤에 음악 활동 안함),
이승희, 김현식, 정광태가 몰려다니며 음주가무를 하며 '날라리' 생활을 하던 때가 있었어요.
김현식도 알고 지냈고... '김현식 스토리'도 사실은 그때부터 시작된 거죠.
누군가 김현식 스토리를 썼던데 그건 너무 부실해요.
그때 (김)현식이가 머리 기르고 다녀서 우리와 동갑인줄 알았어요.
사실 (김)현식이는 1958년생으로 고등학교를 그만 두고 다녀서 그랬던 건데...
Q: 김현식 님 이야기가 나온 김에 이른바 '신촌파'에 속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차제에 신촌파에 대해 여쭈어 보겠습니다. 훗날 기획하신 음반 우리노래전시회를 두고
이른바 '신촌파들의 모임'이라는 얘기도 있는데요.
- 나는 신촌파와는 직접 관련이 없죠. 나는 굳이 말하면 '명동파'에 속했죠.
그때 명동을 놓아 두고 왜 신촌을 가겠어요? 그런 공식 명칭은 없었어요.
1980년대 초반 우리가 이태원의 밤무대에 서면서
조덕환이나 이영재가 하나둘씩 모이게 된 것이지만
신촌파라는 말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네요.
물론 신촌에서 술 마시고 음악 하는 친구들은 있었겠지만...
김현식도 그렇고 엄인호, 박동률 등. 그 선배로는 양병집, 박두영, 유지연 등이 있었죠.
유지연 형은 1973~74년경 내가 양병집 형과 함께 지낼 때
청와대 옆의 유명한 음악다방이었던 사랑방 다방에서 음악 DJ를 하고 있었어요.
Q( 김민규): 명동과 신촌이 달랐나요?
명동이 지금의 압구정동 같은 곳인가요? 또 명동과 무교동도 달랐나요?
- 그럼요. 그런데 신촌은 좀 학구적인 면이 있었고
명동은 날나리들이 많이 오는 곳으로 요즘으로 치면 압구정동같은 곳이죠.
무교동도 명동과 다르고... 그 당시 무교동에는 라이브를 하는 곳이 많았어요.
Q: '통기타 포크'를 말할 때 언급되는 세시봉이나 디쉐네에도 다니셨는지요?
아울러 그 당시 명동에 들락거리던 공간을 구체적으로 거명해주시면 고맙겠네요.
- 세시봉이나 디쉐네에는 거의 가지 않았어요.
대학교 1학년 때는 르 시랑스, 내시빌, 오비스 캐빈에 다녔죠. 이런 라이브를 하는 곳 말고
음반을 감상하는 곳으로는 섬씽, 지중해, 예스, 록 등이 있었고,
한참 뒤에 생긴 곳인데 신촌 409(포 오 나인)도 유명했어요.
신촌역 주변에 최신 스타일의 카페 겸 음악 감상하는 곳이 몰려 있었죠.
Q: 409를 언급하셔서 물어본다면 당시 신촌에서 양병집이 운영하던 OX라는 곳이 있었고,
이곳이 '신촌파'의 집결지였다고 들었습니다.
또 박두영 씨도 카페를 하나 운영했다고 들었습니다.
- 아, '옥스' 말이군요. 그 곳은 양병집 형이 이대생들 좀 꼬셔 보려고
좌대를 하나 만들어놓은 수준이었지요. 열평도 안 되는 '하꼬방' 카페였어요.
박두영 씨는 내시빌파로 기억하는데요.
아무튼 신촌파에 대해서는 나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듣는 게 좋을 거에요.
녹음 세션과 라이브 연주 활동을 시작하다
Q: 처음으로 음악을 하겠다고 결심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어떤 것이었나요?
- 음악 현장에 나서게 된 건
양병집 형이 자기 음반에 기타 세션을 해달라고 부탁을 했었어요.
그래서 그 음반을 녹음할 때 통기타를 쳤죠.
(양)병집이 형은 대학 1년떄부터 동네에서 우연히 봐서 알고 지내던 사이였거든요.
1973년에 나온 양병집 2집인데(주: 발매연도로 치면 1집 [넋두리]이어야 하는데
본인이 2집이라고 회고했다. 혹시 발표되지 않은 음반일지도 모르지만
어떤 음반인지 확실치 않다).
나현구 사장이 있던 뚝섬 스튜디오에서 이 음반을 녹음했는데,
양병집 형을 따라가서 반주를 하던 나를 나사장이 눈여겨보고
월급제로 세션을 해달라고 하더군요. 그때 처음으로 세션 활동을 시작한 거죠.
강근식, 조원익, 이호준, 유영수, 배수연, 이런 분들하고 나하고.
원래 조동진 형이 하던 자리였는데, 그 형이 그만 두자 그 후임자로 제가 들어간 셈이죠.
물론 당시 녹음 세션 활동은 본격적인 음악 활동이라기보다 아르바이트 차원이었어요.
Q: 대학시절부터 녹음 활동을 하면서 보내신 셈입니다.
그렇다면 녹음 활동 외에 다른 음악 활동으로는 어떤 것이 있었나요?
-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음악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던 겁니다.
또 한 가지 일화는 르 시랑스에 자연스럽게 출연한 일입니다.
양병집 형의 반주를 해 주던 당시 이백천 씨가 노래를 불러 보라고 해서 한 적도 있어요.
피터 폴 앤 메리의 "Puff", 사이먼 앤 가펑클의 "Kathy's Song",
"April Come She Will" 같은 노래를 불렀죠.
그리고 이 때 이장희가 DJ를 맡고 있던 '0시의 다이얼'에 반년 정도
매주 고정출연한 일도 있어요.
그 당시 그 유명한 프로그램에 음반도 한 장 내지 않았으면서 매주 고정 출연을 했어요.
이때가 1973년 겨울쯤 되었을 겁니다.
라디오 코리아를 운영했던 PD가 담당했는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네요.
Q: 1970년대 중반기까지 녹음 활동과 연주 활동을 하신 건데,
후일 1970년대 후반에 생긴 대학가요제에는 왜 출전하지 않으셨는지요.
같은 학교에 다닌 조덕환 님은 고인돌(코리아 스톤스)이라는 이름으로
1978년 대학가요제에 출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참가곡인 "날개"는 이영재 님의 곡이었고...
- 대학가요제는 내가 보기에 학예회였지 음악하는 장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나는 솔직히 (조)덕환이 거기에 출전하는 걸 이해하지 못했었어요.
코리아 스톤스라는 그룹을 알기는 알았죠. 조덕환과 이영재가 있었고.
하지만 그때 난 그룹 사운드에 관심이 없었어요.
학교에서 활동하는 게 영 맘에 들지 않았죠.
그리고 막상 대학가요제가 열린 기간에 나는 군대에 있었어요.
중간에 휴학, 복학을 좀 하다가 3학년 마치고 입대했어요.
군대에 있을 때 "제발", "그것만이 내 세상", "매일 그대와", "사랑일 뿐이야"를 작곡했죠.
1980년에 발매한 이승희, 이영재와 함께 만든 음반도
내가 병장으로 근무할 때 녹음한 거에요.(웃음).
Q: 1980년에 음반을 함께 낸 이영재 님과 대학교 동창이고
들국화 1집에 참여한 조덕환 님과 당시는 어떻게 지냈는지도 간략히 말씀해 주십시오.
두 분이 듀엣으로 활동했던 적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 조덕환과는 오랫 동안 알고 지내던 사이였죠.
그리고 이영재는 같은 나이지만 학교는 고대 출신이 아니에요.
둘이 1980년대 초 조·이라는 이름으로 비원 앞의 한 카페에서 활동했던 일이 있습니다.
" 조용히 들어요"가 들어 있는 따로또같이의 2집.
음반에는 나동민 작사·작곡으로 기록되어 있다. 최성원이 기타 세션으로 참여했다.
또한 1980년에 음반을 함께 내는 이영재, 이승희를 비롯,
훗날 들국화 멤버로 활동하게 되는 허성욱 등이 참여해 들국화로 가는
긴밀한 다리 역할을 하는 음반.
Q: 차제에 여쭤 보면 초기에 작곡한 곡들 가운데 "조용히 들어요", "내가 찾는 아이"
두 곡은 '나동민 작사 작곡'으로 기록된 곳도 있고
'최성원 작사·작곡'으로 적혀 있는 곳도 있습니다. 이유는 무엇인가요?
- 내가 처음 쓴 곡이 "내가 찾는 아이"에요.
1973년이고 그 곡은 양병집 형한테도 보여줬어요.
그런데 내가 워낙 음악 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군대 가기 전에 작곡한 곡들인
"사랑하는 님을 찾으면", "조용히 들어요", "내가 찾는 아이", "어린 왕자" 등을
나동민에게 주고 갔어요. (나)동민이는 내 6촌 동생이에요.
군대 가면서 동민이에게 부르라고 했는데, 그게 '나동민 작사·작곡'으로 된 모양입니다.
그후 내가 군대있는 동안 나동민이 강인원, 전인권, 그리고 이주원 형이랑
따로또같이란 그룹을 만들어서 이 노래들을 했다고 들었어요.
“나의 음악은 록이 아니다”
Q: 국내 음악 중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음악인은 누구인가요?
- 김민기 형, 그리고 조동진 형.
어떤 면에서 한국에서 언더그라운드는 김민기 형을 비롯해
조동진, 한대수, 양병집 형 등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내가 그 언더그라운드를 처음 맞닥뜨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한대수 씨는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1974년에 나온 음반이 나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죠.
Q: 그렇다면 '포크'를 좋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혹시 혹시나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등의 포크와
지금 말씀하신 '언더그라운드 포크'를 듣는 층에 따라서 약간의 편가르기같은 것도
있었나요. 예를 들어 한 편은 '순수 포크'이고, 다른 한 편은 '상업적 포크'라는 식의...
- 편가르기를 하는 부류들은 저절로 생기게 마련이죠. 그건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고...
어쨌든 내가 보기에 (김)민기 형은 밥 딜런과 피터 폴 앤 메리의 영향을
굉장히 받은 분이에요. 그건 양병집 형이나 서유석 씨도 마찬가지고.
Q: 최성원 님은 포크 계통 음악을 하셨다가 대학교에 들어온 이후
록을 접한 경우라고 볼 수 있을까요?
이와 관련해서 포크를 좋아하는 사람은 록을 불편해 하는 경우도 있지만
최성원 님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 난 지금도 록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포크를 '힘껏' 하면 록이 아닐까? 하하.
Q: 김민기, 조동진 님과 만난 계기는 무엇인지요?
조동진 님은 신촌의 비잔티움이라는 곳에서 노래를 부르셨다고 하던데요.
- 김민기 형은 고교 시절 음악으로만 접하다가 대학 시절에 만난 적이 있어요.
바하의 악보를 주셔서 (사실은 악보를 잘 못봤지만) 엄숙히 건네 받기도 했죠.
다시는 기타를 치지 않을 것이라고, 서양 악기인 기타로는 우리의 가락을 결코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고 내게 하신 말이 기억납니다(주: 김민기 님과의 만남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카페 http://cafe.daum.net/march에 술회되어 있다).
조동진 형은 역촌동 녹음실에서 처음 만났어요.
그리고 나서 1975년 대마초 사건 이후로 세션 팀이 와해가 되어 버렸지요.
그후 강근식 형이 1970년대 말에 CM송을 제작하는 알파 프로덕션을 운영했는데
(주: 알파 프로덕션은 처음에는 이종명과 강근식이 함께 운영하다가,
1976년 경에는 강근식이 독립해서 강 프로덕션(강 프로)을 경영했다),
조동진 형이 그곳에서 녹음 기사를 했어요. 저도 거기 들어가서 활동했죠
나도 CM 송을 몇 개 썼어요. 한 가지만 말하면 '이브껌'이 있어요.
작곡에 최성원, 녹음에 조동진. 하하하. 정말 코믹한 시대였어요.
Q: "해태껌은 강근식, 아카시아껌은 김도향, 이브껌은 최성원"이네요(웃음).
그밖에 다른 포크 가수분들은 '대마초 파동' 이후 대략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요?
- 그 당시 윤형주 형은 김도향 형과 같이 서울 오디오라는 CM송 사무실을 냈어요.
거기서 히트한 CM송이 오란씨같은 것이죠. 지금은 연극배우인 윤석화가 부른 것이죠.
그리고 송창식 형은 마이 하우스같은 나이트클럽 무대에 계속 섰죠.
그리고 이장희 형은...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야겠네요.
이승희·이영재·최성원의 '옴니버스' 음반을 내다
이승희·이영재·최성원 [노래의 날개/그대 떠난 뒤에는/매일 그대와](서라벌 SRB 0004, 1980),
왼쪽부터 최성원, 이승희, 이영재.
Q: 이 음반을 기획하신 분은 누구시죠.?
- 이승희의 형인 이장희 씨입니다. 이때 (이)장희 형이 반도패션을 운영하면서
락컴퍼니라는 프로덕션을 경영하고 계셨는데 당시 거기에
사랑과 평화, 김현식 등이 속해 있었어요.
제가 군대에서 휴가 나와서 반도패션 매장에 갔더니 '이 노래 어떠냐'며 들려준 곡이
사랑과 평화가 부른 "장미"였어요("장미"가 있는 사랑과 평화의 음반은
광화문의 LAB 스튜디오에서 녹음했어요. 1970년대 말 ~ 1980년대 초 이 스튜디오에서
김영동이나 장끼들이 녹음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우리 음반을 내놓고 1주일 후 형이 갑자기 얘기도 없이
프로덕션과 반도패션 모두 그만두고 도미했어요.
1980년도에 대마초 사건이 터져서죠(주: 이때 사랑과 평화 멤버들이 구속되었다).
(이)장희 형도 대마초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저는 잘 모르지만 아무튼.
Q: 그렇다면 "장미" 등의 작곡자로 되어 있는 이경희 씨는 이장희 님의 본명인가요?
- 아니죠. 이승희의 본명이에요. 그 당시에 (이)장희 형은 대마초 파동에 묶여 있어서
사랑과 평화의 "장미" 등을 모두 다른 사람 이름으로 발표했어요.
예를 들어 김이환, 이경애, 이규형 이런 식으로 발표했죠.
Q: 이장희 님이 이 음반의 기획을 하시게 된 계기는?
- (이)장희 형이 판단하기에 그 당시 우리 또래 중에서 새로운 음악을 하는 이들이
우리 셋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일종의 옴니버스 성격의 음반이었는데 세 명 다 음악적으로 친해서 서
로 도와줄 수 있었으니까 가능했어요.
이거 가발인데 (하하하) 잘 안 보이나요? 말년 병장 때였으니 너무 머리가 짧아서요.
Q: (웃음) 설마 가발이라고 생각했을까요?
그러면 이 음반의 녹음도 광화문 LAB 스튜디오에서 한 것인가요?
- 녹음은 서울 스튜디오에서 했어요.
그때가 처음으로 24 채널로 멀티트랙 녹음 기술을 배운 때였죠.
Q: 이 음반을 내시고 TV 활동은 하셨나요?
- 그때 (이)장희 형의 비서 같은 일을 하던 김석이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이장희) 형이 도미할 때 그 사람한테 매니지먼트를 맡겼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앞에서 말한 '젊음의 행진'이라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할 수 있었죠.
KBS의 이남기라는 사람이 PD를 맡았을 때인데,
매니지먼트를 맡은 그분이 그 프로그램에 꼭 나가야 한다고 해서 출연했어요.
그렇지만 TV에는 그 프로그램에 딱 한 번 나갔을 뿐입니다.
Q: 저희에게 이 음반의 연주인에 관한 자세한 정보가 없는데 누가 연주했는지 궁금합니다.
특히 "매일 그대와" 중간에 나오는 솔로같은 일렉트릭 기타는 누구의 솜씨인가요?
이영재 님의 연주로 보입니다만...
- 그렇죠. 일렉트릭 기타는 (이)영재가 쳤고, (이)영재는 원래 일렉트릭 기타를 쳤었어요.
드럼은 배수연. 베이스는 조원익. 통기타는 우리 셋이 쳤어요.
"매일 그대와"의 간주는 (이)승희가 만들었어요. 그리고 클라리넷을 연주한 사람은 이원재.
들국화 음반에서 클라리넷을 분 이원재와는 동명이인으로 이영재의 동생이에요.
Q: 세 명이 합동음반을 어떻게 작업했는지 궁금합니다.
예를 들어 편곡은 자기 곡을 자기가 알아서 편곡하는 작업하는 식이었는지요?
아니면 밴드는 아니었지만 공작(共作)을 한 편이었는지요?
- 그룹을 하기에는 다들 각각의 개성이 너무 강했죠. 그렇지만 편곡은 같이 했어요.
Q: 그런데 앞면의 타이틀 곡은 이영재 님의 것이고,
뒷면의 타이틀 곡은 이승희 님의 것인데 조금 밀린 것인가요?(웃음)
- 아무래도 내가 그때 군바리라서 밖에 잘 못 나오니까 두 사람이 알아서 했겠죠(웃음)
Q: 이 음반은 별로 홍보를 못하고 묻힌 음반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누군가에 의하면 이승희의 1집(1980)에 수록된 "전화"와
이 음반에 실린 최성원 님의 "매일 그대와"가 라디오에서 종종 나왔다고 합니다.
실제로는 어땠는지요? 그렇게 조금은 히트했는데 혹시 어떤 제작자가
솔로로 음반을 내보자고 제안하지는 않았었나요?
- 이승희의 1집이 이 음반보다 먼저 나왔어요.
그렇지만 홍보는 거의 못 했고, 솔로로 음반을 내자는 제안도 그땐 없었어요.
그때 그 노래가 뜨긴 뜬 건지 난 전혀 모르겠어요.
라디오에 몇 번 나왔다고 떴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네요.
게다가 '방송에 나가서 비실거리지 않으면' 음반을 낼 분위기가 아니었으니까요.
어쨌거나 이 음반 내고 난 다음 전인권과 허성욱을 만났으니까.
Q: 이영재 님은 동방의 빛의 옛날 멤버들, 즉, 강근식, 조원익, 이호준, 유영수가 연주하던
스타일로 음악활동을 하려고 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맞는지요?
- 이 음반 후에 활동한 밴드가 하나 있었어요.
그런데 그건 나이트 클럽, 소위 '밤일'하는 밴드였지요.
오장동에 있는 나이트클럽같은 후진 곳에서도 활동했어요(웃음).
멤버는 이영재, 전인권, 허성욱, 그리고 드러머가 있었고,
베이시스트로 이영재의 동생 이원재가 있었어요.
그리고 그때는 김현식이 확실히 밤무대 쪽에서 떴기 때문에 (김)현식이는 그냥 가수로 와서
노래했어요. 그때 이 팀 이름을 동방의 빛이라고 불렀을 거에요.
들국화가 개화하기까지 전사(前史)들 - 최성원, 전인권, 허성욱 3인조 시절
Q: 3인의 '옴니버스' 음반을 내신 후,
전인권과 허성욱을 모노(mono)라는 카페에서 만나셨다는 것이 '들국화의 정사(正史)입니다.
우선 모노에 대한 자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최성원 님이 운영하신 곳이라는 문서도 있는데 부정확해 보입니다.
- 내가 아니라 양병집 형이 만든 라이브 카페에요.
나는 연예부장, 하하, 이른바 뮤직디렉터였죠.
모노의 위치는 이대 앞 신촌역(기차역) 쪽에 있는 파출소 골목 건너편 2층에 위치했는데,
한 50-60평 정도 되는 큰 규모였어요.
모노를 경영하면서 (양병집) 형은 대단한 꿈을 가지고 있었어요.
한국 라이브의 본산을 만들겠다는 야심이 있었죠.
그때 고정 밴드가 김광민이 있던 동서남북이었어요.
그때 (양)병집이 형이 '국풍 '81'에 내보낼 생각으로 동서남북 음반을 제작했었지요.
당시 멤버는 김광민, 박호준, 이태열 등이었죠.
앞서 말했듯 김광민이 '젊음의 행진'에서 피아노 반주를 해준 것은
당시 (양)병집 형이 동서남북을 키우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때 내가 (조)동진이 형네 놀러다니면서 보았던 조동익을 DJ로 썼죠.
이때가 1981년 경쯤 될까요?
Q: 모노에서 얼마 정도 관여하셨어요?
- 모든 준비과정을 같이 했지만 양병집 형과 약간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개업 일주일만에 그만 뒀어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의견 충돌이 있었겠죠.
그후 양병집 형은 내 후임으로 해바라기 이주호 씨를 앉혔어요.
(조)동익이는 계속 있었어요.
Q: 양병집 님이 여러 개의 카페를 열고 닫기를 반복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 모노는 한 달에 한번씩 인테리어를 다 고쳤을 정도에요.
Q: 양병집 님은 자신의 음악 활동 외에도 여러 포크 음악인들을 발굴하신 분으로 보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최성원 님이 아는 사실을 부탁드리겠습니다.
- 그렇죠. 1970년대에 (양)병집이 형이 이연실의 음악을 다 만들어 주던 시절이 있었죠.
그리고 양병집 형이 3집 정도(주: 2집 [아침이 올 때까지](서라벌, 1980)로 보임) 할 때
정태춘을 발굴했어요.
(정)태춘이는 진짜 하늘에서 뚝 떨어진듯 어떤 연줄도 없이 평택에서 왔어요.
정태춘이 (양)병집 형을 찾아와서 자기가 만든 곡을 보여줬는데 참 괜찮았어요.
그래서 (양)병집이 형이 녹음도 준비해주었는데 이 음반은 아마 발표가 되지 않았을 거에요.
Q: 흔히들 1981~2년경 전인권 님과 허성욱 님이 모노에서 둘이 노래를 하던 것이
들국화 형성의 단초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때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해주신다면?
- 정확한 연도는 기억이 안 나지만, 쌀쌀하던 이른 봄날이었어요.
'연예부장'을 그만둔 후 모노에 놀러갔는데 그곳에서 전인권과 허성욱이 노래하는 걸 봤죠.
(전)인권이는 통기타, (허)성욱이는 피아노를 맡아 "Take It to the Limit", "My Life"를
노래했는데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앞에서 언급했던 밤무대 밴드(주: 김현식을 비롯해 이영재, 전인권, 허성욱, 이원재 등이
있던 일명 동방의 빛)에 있다가 둘이 모노로 와서 듀엣으로 활동했던가 봅니다.
Q: 그 당시에 전인권 님과 김현식 님의 목소리를 비교하면 어떤가요?
- 김현식의 초창기 노래들은 나중의 것과는 180도 달랐어요.
노래를 좀 한다고 생각하던 내가 김현식의 노래를 듣고 '노래를 안 하겠다'고
결심할 정도였죠. 그때 스틱스(Styx)나 앤디 깁(Andy Gibb) 등의 노래들을
기가 막히게 잘했어요. 맑고 힘이 있었죠. 반면 전인권은 허스키한 힘이 있었어요.
당시에 전인권을 보고 정말 노래꾼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두 사람은 스타일이 전혀 달랐죠.
Q: 전인권 님은 그 전에 이미 솔로 음반(1980)을 발표한 상태입니다.
또한 이 음반의 앞면은 강근식 편곡. 뒷면은 이정선 편곡이던데
앞서 알파 프로덕션이나 강 프로덕션의 인맥을 고려한다면
최성원 님도 이 음반의 제작 과정에 관여할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 잘 몰라요. 그때는 내가 전인권을 몰랐을 때였으니까요.
내가 알기로 따로또같이라는 음반을 냈었는데 그 음반을 홍보하는 와중에
(전)인권이가 따로 솔로를 낸 거죠. 결국 신곡으로 (전)인권이의 "맴도는 얼굴"이랑
나의 "매일 그대와"가 라디오에서 같이 나왔었어요. 라이벌이었죠. 하하.
Q: 그러면 전인권, 허성욱 님에게 최성원 님이 같이 활동하자고 먼저 제의하셨다는 말은 맞는 말인가요?
- 그렇죠. 이때 저는 일렉트릭 베이스를 사서 셋이 함께 밤무대에 서게 되었죠.
그 당시에 나는 이미 나름대로 들국화 1집의 밑그림이 되는 노래를 다 만들어 둔 상태였어요.
그때 내 생각으로는 (전)인권이와 (허)성욱이랑 같이 활동하면 모든 게 잘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Q: 그때 그려놓으신 들국화에 대한 컨셉트는 '록 밴드' 형태였나요,
아니면 따로또같이나 '이영재 이승희 최성원'처럼 느슨한 프로젝트였나요?
- 그때까지는 그렇게 구체적인 생각은 하지 않은 상태였어요.
그 대신 서로 없는 부분에 대해서 보충이 되리라는 막연한 생각만 했죠.
가령 그때까지 전인권과 허성욱은 한국 대중음악보다는 팝송에 심취한 상태였기 때문에
녹음 과정이나 '가요'에 대한 개념이 없었을 겁니다.
그런 부분은 기존의 내 활동 경험으로 보완이 되리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사실 제일 급했던 것은 일당이었어요.
그래서 일단 '밤일'을 할 수 있는 포메이션을 만들었지요. 그때 나는 이미 결혼을 한 상태였거든요.
Q: 어쿠스틱 기타를 계속 연주했는데 왜 굳이 베이스를 연주하시기로 한 것인지요?
- (전)인권이의 노래와 (허)성욱이의 피아노에 사운드에 베이스를 입히면 좋아질 것 같아서였죠.
이전에 한번도 베이스를 친 적이 없으면서 말이에요(웃음).
이때 처음으로 7만원짜리 베이스 기타를 낙원상가에서 샀어요.
하지만 줄이 한 줄 없을 때가 많았어요. 예를 들어 이태원에서 일하다가 줄 끊어지면
그걸 사러 가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한 줄 끊어지면 나머지 3줄로 쳐야 했죠.
Q: 그때 '밤무대'에 설 때 드럼이 없어서 일하기 힘든 면은 없으셨는지요?
- 드럼이 있으면 오히려 일하기 힘들었어요.
드럼이 있으면 나이트 클럽에서 춤을 위한 백 밴드밖에 더 되었겠어요?
우리가 연주했던 곳은 춤추는 곳이 아니라 음악을 감상하는 라이브 클럽이었기 때문에
드럼이 없는 편이 차라리 나았어요.
Q: 이때 세 분이 연습은 어떤 곳에서 하셨는지요?
- 그때 상도동에 있던 (전)인권이네 조그만 방에서 연습했어요.
뒤에 나오겠지만 나중에는 방배동에 있는 카페 건물 하나를 빌려서 연습하게 되었고...
이태원 라이브 클럽에서 빛을 발하다
들국화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전에 했던 최성원, 전인권, 허성욱의 3인조 활동이 잠시 중단되자,
전인권, 허성욱은 조덕환과 함께 활동했다.
Q: 다른 나이트클럽도 많은데, 왜 이태원으로 진출하셨죠?
또 이곳에서 일할 때 들국화(의 전신)를 발탁하거나 도움을 주신 분이 있다면 어떤 분이신지요?
- 이태원에 간 것은 일자리가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우리는 그때까지 다른 곳, 특히 밤업소는 잘 몰랐거든요.
그리고 누가 발탁했다기보다는 셋이 뭉쳐서 찾다 보니 그쪽으로 진출하게 되었어요.
제일 먼저 잡은 일자리가 이태원 크라운 호텔 옆에 있던 뮤직 라보(Music Labo)였어요.
유명한 TBC '쇼쇼쇼' PD 조용호 씨가 만든 것이었죠.
Q: 그렇다면 조용호 님이 TBC가 KBS로 통폐합된 후 KBS의 [빅 쇼]로 자리를 옮겼다가
머잖아 KBS까지 그만 둔 다음 뮤직 라보를 운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맞는지요?
- 맞아요. 조용호 씨가 (전)인권이 팬이어서 거기서 일을 하자고 제안하셔서 시작했지요.
Q: 그때 밤일을 한 다른 곳이나 연주한 레퍼토리도 좋은 정보가 될 것입니다.
- 이 무렵 이태원의 자마이카란 술집에서도 섰었어요.
몇십 개의 스탠드바가 합쳐져서 커다란 술집을 이룬 곳으로 각 스탠드바에
여자 바텐더들이 하나씩 상주하는 아주 웃기는 빠였죠.
당시 그 술집 사장이 만들어준 이름인 블루 코멧이란 이름으로 활동했어요.
전인권(통기타), 허성욱(피아노), 나(베이스), 이렇게 셋이었죠.
우리는 모두 하얀 남방에 멜빵에 청바지 차림으로 7시부터 시작해
새벽 4시까지 총 여덟 스테이지 정도를 했어요.
일렉트릭 라이트 오케스트라의 "Midnight Blue", 빌리 조엘의 "My Life"(이 노래는 정말
성욱이가 죽였죠)과 "Honesty", 그리고 스틱스의 "Boat on the River",
그리고 엘튼 존 노래, 그리고 누가 부른지 기억나지 않는 "Free Bird" 등
(주: 자마이카에 대한 이상의 진술은 다음 카페 글을 참고해 정리한 것이다).
그때 심심풀이로 유일한 창작곡을 하나 했는데 "매일 그대와"였어요.
그 당시 웬일인지 (전)인권이는 "맴도는 얼굴"을 아주 싫어했어요.
"고향초"나 "희망가" 같은 노래는 가끔 불렀지만(웃음).
Q: 최성원·전인권·허성욱 3인조로 이태원에서 언제까지 활동하신 건가요?
그 당시에도 이미 그룹의 이름이 들국화였다고 알고 있는데,
1984년에 나온 [우리노래전시회]에는 전인권, 최성원 등 솔로 이름으로 나옵니다.
- 밤일을 하던 중 어떤 팬, 그러니까 독지가가 800만원을 주겠다고 해서 음반을 만들려고 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밤일'을 그만두고 방배동에 있는 망한 카페 하나에 월세로 들어가서 연습을 했어요.
그러다 (전)인권이랑 나랑 크게 다퉜어요.
(전)인권이 집에도 우환이 있었을 거에요. 그래서 다 뿔뿔이 흩어졌었어요.
Q: 그때 일단 그룹이 깨진 셈이군요. 들국화의 '깨지고 모이는 역사'의 첫 사건으로 보입니다(웃음).
그렇다면 그후 '우리 모두가 한 자리에 모여'인 상태가 되기까지 어떤 일들을 하셨는지요?
- 그렇죠. 나는 [우리노래전시회]와 내 솔로 음반을 제작하려고 했죠.
그 동안에 (전)인권이는 (조)덕환이를 불러들여 (허)성욱이랑 3인조로 활동을 계속했더라구요.
Q: 전인권·허성욱·조덕환 님의 3인조 그룹도 '밤무대 그룹'이었어요?
- 그 동안에 용평 페스티발에 출연하기도 하고 방송 출연 같은 것도 하면서
1년 정도 드문드문 활동했을 거에요. 그렇지만 '밤일'을 하지는 않았을 거에요.
[우리노래전시회]에서 새로운 감수성을 발굴하다
[우리노래전시회 I] 동아기획/서라벌(SRB 0142), 1984
Q: 전인권, 허성욱 님과 잠시 헤어지시고
혼자 계시던 동안 우리노래전시회를 기획하신 것이라고 보면 되겠군요.
그 음반에는 최성원 님이 작곡한 곡을 다른 가수가 부른 경우가 많던데요.
- 그동안 곡을 많이 써 두었어요.
그리고 가수들을 참여시키기 위에서 내 노래를 다 나눠 줘야 했어요.
"그것만이 내세상"의 경우 처음에는 내 목소리로 작업을 했지만
아무래도 전인권에게 부르게 해야겠더라구요.
Q: 이 음반은 곡은 좋지만 음질은 그리 좋지 않습니다.
녹음 스튜디오는 어디였고 녹음 방식은 어땠는지요?
- 음반을 제조해준 서라벌 레코드와 이야기할 때 녹음실을 쓰게 해달라고 했고
세션비 지원을 해달라고 했어요. 녹음은 광화문 LAB 스튜디오에서 했고 8트랙 레코딩이었죠.
당연히 음질은 좋지 않을 수밖에 없었죠. 비용을 아끼기 위해
드럼도, 베이스도 내가 다 연주했어요.
아주 중요한 곡, 도저히 내가 커버할 수 없는 곡들은 한 두명의 세션들에게 연주하게 했어요.
드럼을 연주한 안기승 씨가 그런 경우죠. 이 분은 따로또같이 2집(1984)에도 참여했고...
Q: 이 음반은 현재 동아기획에서 배급하고 있는데 당시에는 김영(동아기획 사장) 씨와는 관련이 없나요?
- 당시에는 전혀 관련이 없었죠. 음반은 어느 정도는 팔렸지만 들국화 활동하면서 관리하기 어려웠어요.
그래서 들국화 1집을 낸 다음 김영 씨가 이 음반을 인수했어요.
Q: 조동익 님은 양병집 님이 부르신 "이세상 사람이"를 작곡하고 음반에서 기타도 치셨는데
이때 이미 어떤날이라는 그룹이 실재했던 것인가요?
"비둘기에게"를 수록한 시인과촌장의 경우도 실제 멤버는 하덕규 님 혼자라고 보이는데...
- 그때 당시엔 없었어요. (조)동익이도 첫 녹음을 한 거에요.
내 생각에 (조)동익이의 내성적인 성격에 혼자 활동하면 잘 안 될 것 같아서,
'지금은 혼자이지만 이제부터 넌 그룹이다'라며 '어떤날'이라는 이름을 지어줬어요.
하덕규도 그때는 혼자였지만 시인과촌장이라는 이름으로 하라고 했어요.
시인과촌장은 하덕규가 옛날에 하던 듀엣 이름이었거든요.
Q: 이 음반에서 노래를 부른 박주연 씨는 '그 박주연 씨'가 맞나요? 작사가로 유명한...
- 맞아요. 나중에 유명한 작사가가 되었죠. 하광훈과 콤비를 이루기도 했고.
이 음반의 "그댄 왠지 달라요"로 데뷔를 한 것이고 솔로 음반도 몇 장 발표했어요.
Q: 그러면 이제 문제의 들국화가 등장할 차례이군요?
- 좀 쉬었다 하기로 하죠. 이 집 오리 진흙구이 맛있죠?(웃음). 20030401
→ 최성원과의 인터뷰(2)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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