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속에서 또 다른 여행을 떠나다

1997 필리핀(마닐라) - 세번째 감상 (4-끝)

아하누가 2024. 6. 26. 00:42



1997년 3월 31일(월)

 

간밤에 여러 곳을 다니느라 꽤 늦은 시간에 잠이 들었는데
서둘러야 하는 아침 일정 때문에

무척 이른 시간에 눈을 뜨려니 몹시 힘들었다.
평소 체력 관리도 중요하지만 여행 일정에 있어서의 체력 안배 또한
몹시도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다는 사실을 서너번 되새기며 호텔을 나섰다.

 

 

마닐라 관광에서 빠질 수 없는 코스인 ‘팍상한 폭포’를 가는 날.
벌써 3번이나 필리핀에 왔지만

이상하게도 ‘팍상한 폭포’와는 인연이 없었다.
3번째 방문만에 가보는 ‘팍상한 폭포’.

우리말로는 이상한 이름을 가진 곳이지만
이곳 마닐라에서는 유명한 관광지 중 한 곳이다.

이곳에 오기 전부터 우리나라의 많은 TV프로를 통해 보아왔고,

또한 월남전을 그린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영화

‘지옥의 묵시록’의 로케 현장이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어서 그런지 왠지 낯설지 않은 느낌을 받았다.

 

2인이 탈 수 있는 작은 카누 모양의 배로 폭포가 있는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보트를 끌고 올라가는 인부 두명의 노력이 안쓰러워

내가 내려서 같이 끌고 가려는 생각까지 들었다.

팁이라도 좀 더 달라는 눈치였으나 절대 주지 말라는
가이드의 충고도 있고

또 간밤에 느꼈던 깍쟁이 여행이라는 새로운 결심도 있고 해서
모른 척하고 앉아 있었지만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다만 깊게 패여진 계곡 - 바로 이곳이 영화에서 보던 그 장소이다 - 을 지날 때
그 화려하고 웅장한 경관에 자못 진지해지기까지 했다.

 

약 1시간 반 정도를 거슬러 올라가니 꽤 큰 폭포가 나타난다.
바로 저 곳이 그 곳이려니 하는데 모두 보트에서 내려서 뗏목으로 올라타란다.
설마 저 폭포밑으로 가려는 건 아니겠지 하고 생각하는데

안내원으로 보이는 한 사람이
제법 유창한 한국말로 ‘시원한 맛사지’라고 한다.
아침에 가이드가 갈아 입을 옷을 한벌 더 가지고 나가라는 말이 심상치 않았는데
그것이 현실로 눈 앞에 닥치고야 말았다.

 

그리고 어느 새 우리 일행은 태어나서 가장 심한 물벼락을 맞고 있었다.
속옷이고 뭐고 안 젖을래야 안 젖을 수 없는 물벼락…….
문득 비닐로 서너번 감싸둔 주머니 속의 담배가 걱정된다.

정신이 없긴 없었던 모양이다.

 

 

내려오는 길은 꽤 순조롭다.
약 한시간 반 동안 올라갔지만 내려오는 것은 약 20분 남짓.
햇빛을 피할 데 없는 강 한복판이어서 온 몸이 따갑다.
아침 일찍 서둘러 도착한 탓에

우리가 올라갈 때는 내려오는 일행을 보지 못했는데
우리가 내려오는 길에는 많은 관광객이 올라가고 있었다.
같은 길을 이용하니까 오가는 관광객이 마주치게 마련인데

올라오는 모습들을 보니
왜 그렇게 웃음이 나던지 남모를 웃음을 한참 웃었다.

올라가던 일부 관광객이 우산을 - 햇빛을 피하기 위한

용도로 보이지 않았다 -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어떤 관광객은 미리 준비했는지 비옷을 입고 있었다.
우산이나 우비로 해결될 그런 물벼락이 아닌데 말이다.

 

기대를 많이 했던 탓인지 생각했던 것보다는 다소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외국인 관광객을 내가 서울에서 안내한다면

어디를 데리고 가야할까를 생각해보니 그것 또한 쉽잖게 느껴진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놀이동산식의 관광지 보다는

훨씬 나은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돌아오는 길은 제법 차들이 많아져 마닐라의 원래 모습을 찾은 것 같아
이상한 반가움이 들었다.

교통 체증을 예상해서 아침 일찍 서두른 보람을 찾는 것 같아
이 또한 몹시도 다행스러웠다.

 

호텔에 돌아오니 먼저 기다리고 있겠다며 큰 소리를 치던 또띠가 보이지 않는다.
자주 있는 일이어서 그리 걱정은 하지 않았는데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늦게 나타날 때면 그는 항상 무언가 그럴듯한 변명을 하곤 했다.
오늘은 도대체 무슨 변명을 할까 생각하니 웃음이 나온다.
꽤 친해져서 그런지 또띠는 제법 농담도 잘하는 편이다.
또띠뿐 아니라 이곳 사람들은 농담도 잘하고 쾌활하게 웃기도 잘한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도 말이다.

 

또띠는 자신의 친구에게 나를 소개할 때도
평범하게 하지 않는다. 늘 ‘코리안 갱’이니 ‘마피아’니 하면서
엄지손가락을 힘있게 보이며 엄숙한 표정을 짓곤 했었다.

 

 

또띠가 왔다. 늦게 온게 미안한지 조금 어두운 얼굴이다.
무슨 일이냐 묻고는 그의 대답을 기대했더니 역시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에 다녀왔다고 한다. 잠시 걱정하기도 했지만
이 친구의 변명은 한시간 이내로 모든게 밝혀지는 거짓말이다.

단순해서 그럴까? 순박해서 그럴까?

 

일단 그 자리를 벗어나려는 것이 이 친구의 생각인 것 같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이번엔 조금 더 깊숙한 골목 문화를 찾았다.
술집은 술집인데 조금 느낌이 이상한 걸 보니

아마도 매춘과도 관련이 있는 곳 같다.
자리에 앉아 있으려니 매춘부인 듯한 여자가 다가온다.
나는 단호한 말투로 ‘난 여자가 싫어!’라고 하고, 그 이유를 묻는 그 여자에게
나는 남자가 더 좋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옆에 있던 또띠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한참이나 나를 쳐다보더니
이내 농담임을 알아채고는 웃기 시작하는데 꽤 오랜 시간을 웃어 댔다.

그리고는 그와 비슷한 상황은 물론이고 전혀 비슷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그말을 자주 하면서 나를 끌어안곤 해서

몇번을 그 친구하고 부둥켜 안아야 했었다.
꽤 재미있는 농담이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유심히 들여다보니 이곳 술집은 꽤 신사적이다.

아니 신사적이라기 보다는 보수적이다.
이곳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꽤 선정적이고 퇴폐적이라는 쇼인 모양인데
내가 보기에는 전혀 선정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보니 이곳에서 여자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하긴 우리의 70년대말이나 80년대초를 생각하면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되기도 하지만…….

 

 

확실히 문명이 발달하고 문화가 발전하면 그 그림자 또한 커지는가 보다.
우리가 지금 그런 과정을 겪고 있고 또 일부 선진국의 음지를 생각해봐도
쉽게 이해되는 걸 보니 더욱 그렇다.

경제가 계속 발전하고 사회 구조가 선진화될수록
그에 따르는 도덕과 인성에 대한 교육 또한 너무도 중요하게 느껴진다.
특히 우리 청소년들은 퇴폐적인 문화를

여과없이 쉽게 접하게 되는 환경에서 생활하고 있고
더욱이 그를 이용하려는 일부 상인들도 있으니 어째 뒷맛이 개운치 않다.
이들과 우리가 가진 사회적 문제점에 대한 차이가 꽤 크다고 여겨졌지만
한편으로는 잘살고 못살고의 차이가

인간적인 삶과는 관련이 없다는 생각도 든다.

 

갑자기 술집에 앉아서 그런 생각을 하는 나를 발견하고는 멋적게 웃었다.

모든 여행이 그렇겠지만 마지막 날은 항상 아쉽다.
내일이면 서울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반가움과 아쉬움이 한번에 교차되는
묘한 느낌이 드는 것은 물론 창밖으로 보이는 자그마한 현상 하나 하나가
조금 더 정겹게 와닿는다.
처음엔 좀 무섭기도 했지만 금방 친해지는 것이 이곳 사람들의 큰 특징인데
이제 좀 친숙해지려니 어느덧 이별할 시간이다.
이 또한 여행의 매력이라고 생각해버리기엔 조금 아쉽다.

 

 

 


4월 1일 (화)

 

서울로 돌아가는 날의 아침이 되니 어제까지 느꼈던 아쉬움이
서울에서 반갑게 맞이할 식구들의 모습으로 너무도 가지런히 정리된다.
갈 때와는 또 다른 올 때의 생각인지 마음은 서둘러 집을 향한다.
어느 여행이나 마찬가지로 돌아오는 날의 아침은

아무런 일정이나 감상에 젖을 수가 없다.
이 또한 한편으로는 알뜰하지 못한 하루인 듯한 생각도 들고
또 한편으로는

마치 마지막날의 감상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하루인 것 같기도 하고......
하여튼 머리는 복잡했다.

 

또 다시 필리핀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아쉬움과
몇 일간 이곳에서 있었던 수많은 느낌들을 얼마 동안이나 기억할 수 있을까 하는
한계를 가진 기억의 섭섭함, 그리고 큰 사고나 질병없이 지낼 수 있었던
다행스러움이 교차되면서

그동안 나름대로 유익한 여행을 위해 애써준 몇 사람이 생각난다.
공항까진 못가겠다며 작별 인사를 하며 눈물을 글썽이던

또띠의 모습도 떠오른다.

여행을 가기 전 날의 설레임의 절대값이 더 클까?
아니면 여행의 마지막 날에 느끼는 아쉬움의 절대값이 더 클까?

어느 덧 스산한 4월의 밤에 서 있었다.

 

 

 

 

 

 

 

아하누가
세월이 많이 지나 수십번의 방문도장이 여권에 찍혔을 때가 되어 나는 이때 가졌던 모든 의문들을 풀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 의문은 더 오랜 시간이 지나야 풀릴 것이다. 그런게 여행이고 또한 세상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