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속에서 또 다른 여행을 떠나다

1997 필리핀(마닐라) - 세번째 감상 (3)

아하누가 2024. 6. 26. 00:41


 


1997년 3월 30일(일)

 

느낌도 그렇고 주워 들은 얘기도 있고 해서 오늘의 일정은

그리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현지 가이드도 오후에 오라고 했고

그 시간을 이용해 호텔 수영장을 찾았다.
의아해 하던 가이드의 표정이 생각난다.

보기 드물게 맛보는 오랫만의 한가로움이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찾은 화산지역 ‘따가이따이(Tagaytai)’. 카비테(Cavite)에 있는
피서지로 해발 700m에 위치하여 마닐라에 비해 서늘하며
타알화산(Taal Volcano)과

그 주위를 둘러 싼 타알호(Taal Lake)의 절경을 즐길 수 있다. 
우리나라의 통일전망대 같은 분위기로

내국인 관광객이 많고 가족과 연인들이 많이 찾는 곳인 듯하다.

 

맥주 한잔 하려고 전망이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잠깐 맥주 얘기를 짚고 넘어가자.

필리핀의 명물로 제일 먼저 꼽는 것은
유니크한 모습과 운행 방식을 가진 ‘지프니’일 것이다.
2차대전 당시 미군이 버리고 간 트럭을 개조해서

시민의 발인 대중교통으로 만들었다.
안가는 곳이 없고 안 서는 곳도 없는 재미있는 교통 수단이다.
요금은 거리마다 다르고 여러개의 노선도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명물을 꼽으라면 역시 이곳의 전통 맥주인
산미겔(San Miguel)을 꼽고 싶다.
이 맥주는 세계 10대 맥주의 하나라고 하는데 병의 상표에 표시되어 있는
SINCE 1890이라는 표기가 그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맛 또한 일품이어서 맥주 한병을 채 못마시는 나도

한병을 가볍게 비우곤 한다.
아마 이 맥주의 맛과 제조 방식이 이 곳의 기후와 풍토에
너무도 잘 어울리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즉 산미겔을 한국으로 가져가 맛을 보아도

과연 지금 느낀 맛이 그대로 남아있겠는가 하는 의문도 든다는 것이다.
일부 이 곳 현지인들은 이 맥주의 제조 원료가 화학주라 하여
뒷맛이 좋지 않다는 사람도 있다고 하지만

어쨌든 맥주 맛은 참 좋다. 일품이다.
맛을 기억한다는 사실 또한 여행이 주는 커다란 매력이 아닐까?

 

 

잠시 이런 생각을 하는데

마치 멕시코를 연상시키는 뮤지션 트리오가 우리 일행 앞에 와서
노래를 불러준다.

어떻게 알았는지 ‘사랑해’와 ‘아리랑’을 목청껏 불러댄다.
하긴 그게 직업인데 모를리가 없겠지.

 

호텔로 돌아오는 길이 조금씩 밀리기 시작한다.
지금은 부활절 주간으로 이 곳의 큰 명절인 셈이다.
그래서 모두들 ‘성 목요일’부터 부활절인 일요일까지 4일간의 휴가를 가지며
귀향도 하는 모양이다.

근로자는 월요일까지도 쉰다고 하니 분위기는 우리의 설날이나
추석과 다를바 없다.

아마 슬슬 귀경(?)을 하는 시간인가 보다.

 

돌아가는 시간을 잠시 빌어 이 곳의 재래 시장을 들렀다.
이런 곳을 관광 일정으로 잡는 여행사는 없겠지만 문화를 가장 쉽게 느끼고
접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런 곳이란 생각이 들어 잠시 틈을 내었다.
시장에 오니 비로소 생기가 돈다.

사람 사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본 것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오랜 휴가를 끝내고

다시 생활의 활력을 찾는 이곳 사람들의 모습 때문이었을까?
잔잔한 여행의 감흥은 계속 이어진다.

 

 

호텔로 돌아오니 또띠가 반가운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내 일행들을 생각해서 옷차림도 제법 신경쓴 것 같아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주요 일행들을 소개해 주었는데

일일이 이름을 말해주는 것도 불필요할 것 같아
남자는 주로 ‘오빠’ ‘형’ ‘깡패’등의 말로 이름이라 했고,
여자들은 ‘이쁜이’ ‘누나’ ‘공주마마’ 등으로 설명했더니 이 이름들을
하나하나 되물어가며 외우고 있어서 우리 일행은 한참이나 웃어야 했다.
저녁 식사나 하자니까 먼저 했다고 한다.

 

정말 식사를 했다는 건지 아닌지 이 친구는 참 알 수가 없다.

그러면서 이 근처에 경찰관 친구가 있다며
그 친구도 좀 만나야 한다고 한다.

경찰이라는 단어에 유난히 힘을 주고 말하는 것을 보니
이 나라에서는 경찰이라는 것이 꽤 좋은 직업이거나 아니면
큰 힘을 발휘하는 직업인 것 같았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밤거리 관광에 나섰다.
일반에게 널리 알려진 유명한 장소를 찾는 것도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겠지만
이름 모를 거리의 까페나 술집 또한 좋은 여행 거리인 듯 싶다.

 

 

난 이곳의 수준 높은 노래 문화를 좋아한다.
약 330년간 스페인의 지배를 받던 식민지 시절, 필리핀의 정신적 지배를 위해
스페인은 강력한 종교 정책을 폈다.
스페인이 늘 그랬듯이 온 국민을 강제로 카톨릭에 입교하도록 한 것이다.
결국 필리핀은 지금 전 국민의 80% 이상이 카톨릭 신자인
아시아 유일의 카톨릭 국가가 되었고,

뒤늦게 이곳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미국은
뿌리 깊은 카톨릭 정신 때문에 어떠한 정신적 지배도 할 수 없게 되자
문화적 지배를 위한 문화 보급을 정책적으로 실시하게 된다.
그래서 미국은 이들에게 향락 문화, 즉 로큰롤과 코카콜라로 대변되는
음악 문화로 이들을 지배하게 된다.

물론 이들이 영어를 쓸 수 있게 된 것도 이 때의 영향이기도 하고,
또 일부 현지인은 경제의 낙후 또한 이 향락 문화 때문이라고 하기도 한다.
어쨌든 그로 인해 이들은 누구보다도 뛰어난 음악적 소질을 갖게 된다.
작은 술집이라도 항상 생음악 밴드가 있고 온 국민이 이런 문화를 즐기고 있다.
미국의 문화적 지배에 따른 영향인지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이들이 즐겨부르는 꽤 많은 노래가

70년대와 80년대 초반의 미국 노래라는 사실이다.
30대와 80년대 학번, 그리고 60년대 출생이라는 소위 386세대라는 내게는
무척 반가운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맥주 한병의 값은 우리 돈으로 약 2,000원 남짓.
안주라는 개념이 없는 이곳의 문화가 무척 다행스럽다.

 

 

저녁이 깊어가는 시간, 한 호텔의 카지노를 찾았다.
마닐라에 3곳 밖에 없다는 이곳은 우리와는 달리
카지노에 내국인도 출입이 가능한 것 같은데 그 출입 절차가 조금 번거롭다.
반바지 차림도 안되고

옷깃이 달리지 않은 티셔츠도 안되고 샌들차림이나 운동화도
출입이 안된다.

모자를 쓰고 갔는데 모자를 벗으란다.
일행 중에 한 사람이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그 역시 제지를 했다.

그런데 한가지 재미있었던 것은 코리안이냐고 묻더니 그렇다니까
더 이상의 제지없이 그냥 통과시켜준다. 왜일까?
이유를 생각해 보곤 곧 불쾌하고도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카지노 입장료를 받는다는 것이다.
우리돈으로 약 3,300원 정도였는데

아마도 내국인의 출입을 통제하려는 의도인 것 같다.
이곳 카지노는 돈버는 행운이 잘 주어지지 않는다.
내가 특별히 운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실력이 그리 큰 영향을 미치는
게임이 아닌 쉽고 간단한 게임이었는데도 그렇다.

또 흔히 하는 블랙잭이나 포카 등도
그 기본 배팅액, 미니멈이 만만치 않은 액수다.

내 생각으로는 이들이 카지노를 위한 관광객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인 것 같다. 
대부분이 그저 한번씩 들렸다 가는 관광객일 뿐,

또 다시 와서 이 곳을 들르지는 않는
그런 관광객이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출입구에서의 일도 생각나고 해서 일찍 마무리지었다.
앞으로의 여행에는 좀 더 깍쟁이가 되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아하누가
여행은 아는 만큼 보인다. 저 당시엔 저렇게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