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러리맨의 낮은 아름답다

기억력의 대가

아하누가 2024. 6. 26. 00:14


     

      
      점심식사 전 핸드폰이 울린다.
      걸어주는 이가 많지 않아 잘 울리지 않는 핸드폰인데
      그나마 발신자를 보니 기억에도 없는 번호다.
      대개 그런 전화인 경우는

      뭐 사라거나 밀린 카드 값 빨리 내라는 전화밖에 없다. 
  


      "여보세요? 나 누군지 아슈?" 
  


      상대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또한 매우 싸가지 없다.
      주로 그런 전화는 철저히 무시하는 성격이라 일방적으로 끊을 심산으로
      매우 점잖게 대답했다.
      그랬더니 다소 경직된 내 목소리에 조금 놀랐는지 순순히 정체를 밝힌다.  
 


      "나요, 나. 강부장!" 
      "......!" 
 


      한 10년전이었을까?
      아니 5년은 분명 넘었고 10년이 채 되지 않은 오래 전에
      같이 일하던 동료직원이었다.
      제법 친하게 잘 지내다 개인적인 일 때문에 내게서 멀어진 옛 동료였다.
      후에 어떤 작은 회사에서 강부장이란 직함으로 있을 때
      우연히 한 번 만난 기억이 있었다.        
      


      "아이구, 이게 누구여? 그래 살아있으니 이렇게 만나기도 하네?"   
      


      반갑게 대답을 하고 자초지종을 물으니 그동안 하던 사업도 안되어
      이리저리 고생만 하고 집 식구들 보기 민망해 조용히 잠적하고 있다가
      다시 이 계통에 나타나 일을 보다가 내가 아는 거래처에서
      내 소식을 들은 모양이었다.
      악하진 않아도 사고를 칠만한 소지를 충분히 가지고 있었으므로
      능히 그 행적이 짐작되고 있었다.          

 

   
      얼른 오라는 내 말이 반가웠는지 10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에
      내가 일하는 곳으로 나타났다.
      딱히 얼굴 붉힐만한 사이도 아니었으니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같이 밥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와 커피를 마시던 중이었다.           
      그저 살아온 얘기들이며 오랜만에 옛 직장 얘기로
      화제는 만발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강형이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아직도 일요일마다 여의도에서 축구하쇼?" 
      "하하하. 여의도는 이미 떠났고 지금은 다른 곳에서 하지..."  
      


      약간 생소한 질문이긴 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대답을 했는데
      갑자기 강형은 나를 향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저 웃음은 도대체 무얼까. 앗? 그리고 불현듯 생각나는 것은?  
      


      그렇다.            
      그와 나는 예전에 직장 생활할 때 인생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작은 기억력의 능력으로 서로 자존심 세워가며
      대결을 벌이곤 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버스번호를 외운다던가, 예전에 뭐가 있던 자리였다던가 또는
      무엇의 옛 이름이 무엇이더라는, 사는데 있어 하나도 도움 안되는
      필요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기억력으로 맞부딪히는 순간에는
      살면서 아무 도움이 없는 것일수록 기억력에 대한 탁월함을
      대변하곤 했다.       
      그러니 지금의 이 질문은 대략 10년 전 내가 여의도에서 일요일마다
      축구를 했었다는 자신의 탁월한 기억력을 넌지시 과시하고 있는
      사실이었으며 또한 그 웃음은 그런 의도도 모른 바보같은 나의 대답을
      비웃듯 지은 웃음이었다.  
      


      잠시 당황했다.
      그리고 얼른 머릿속의 기억을 10년전으로 급히 리와인드 시키며
      말을 주고 받고 있었다. 잠시후 나도 회심의 질문을 던졌다.  
      


      "큰 아들 이름이 상훈이었지? 지금 많이 컸겠네?"  
 


      남의 아들 이름까지 기억한다는 것은 대단한 기억력이다.
      누가 뭐래도 그런 기억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강형은 일순간 긴장된 표정이 역력해졌고 자신도 무언가 날릴 수 있는
      회심의 일격을 준비하고 있는 듯 했다.                   
 


      "먼저 타고 다니던 프라이드는 아직도 타나? 2283이었나. 번호가?"        
      


      제법 비중있는 공격이었다.

      특히 차번호 부분에서는 내심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작년까지 타다가 오래되어 지금은 다른차로 바꾸었다고 대답을 하는
      그 짧은 순간에서도 나의 잔머리는
      기억력이라는 능력과시 앞에서 계속 핑핑 돌아가고 있었다.       
      


      "왜 그전에 신설동 럭키수퍼 옆에 살았지? 아직 거기 사나?"  
       


      앞의 질문보다는 조금 약했지만 나름대로 의미있는 질문이었다.
      집 앞의 구멍가게 이름까지 기억한다는 나의 뛰어난 기억력을
      과시하기에 제법 부족함이 없는 듯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엔 일순간 긴장이 흘렀다. 이제 정상적인 대화는
      이미 물 건너간 상태였고 누가 더 쓸모없고 인생에 도움 안 되는
      작은 기억을 생생하게 더듬어 내는가에 대화의 초점은 맞추어져 있었다.
      강형이 또 입을 열었다. 
  


      "집사람 이름이 00씨 아니었나? 잘 계시지?" 
 

 

      몹시 놀라운 기억력이었다.
      우리 마누라를 본 것이 결혼식이 고작이었을텐데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었다.
      한편으론 남의 마누라 이름이나 외는 쫀쫀한 놈이라고 흥분할 뻔했으나
      이렇듯 작은 기억력의 우위에 자존심을 걸고 있는 대화에
      쉽게 흥분한다는 것은 이미 승부를 하지 않겠다는 의미임은 또한 분명했다. 

 


      그런 상대의 뛰어난 기억력에 강력한 결정타를 맞은 듯
      몹시 흔들렸으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그저 평범한 듯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대화를 했다. 그러면서도 한쪽 두뇌는
      인터넷의 검색엔진처럼 10년전의 작은 기억을 계속 검색하고 있었다.

 
            
      결국 내게도 결정적인 찬스가 왔다.
      이렇게 결정적인 찬스가 온 것을 나의 뛰어난 기억력 때문이라고
      한껏 흐뭇해하며 나 또한 회심의 일타를 멋지게 날렸다.
 
 
      "거, 왜 예전에 별거중이라 하지 않았나? 지금은 잘 지내? 허허허"  
     
     
      나의 뛰어난 기억력에 감동했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강형의 얼굴은 금방 어두워졌고 우물쭈물 대답을 회피하다 그만
      어색한 분위기가 되고 말았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생각은 했지만
      승리의 기쁨에 도취되어 얼른 화제를 내가 좋아하는 축구로 돌렸다.
      하지만 강형은 몇 마디 힘없이 던지고는 잠시후 사무실을 떠났다.         

 

 


                *          *          *   

 


      
      기억력도 좋지만 물어볼 걸 물어보아야 한다.
      그리고 좋은 일만 기억하기에도 내 작은 머리로는 이 세상의
      수많은 일들이 너무 벅차다.
      기억을 하더라도 좋은 것만 기억하자.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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