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핸드폰에서 문자메시지가 왔다는 신호가 울렸다.
문자 메시지와 친할 나이가 이미 지났다고 판단되어
아마도 이상한 판촉행위를 하는 업체들의 메시지일 듯 싶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열어보니 발신인이 직장 후배로 되어 있다.
옆자리에서 일하는 사람이 내게 메시지를 보낼 일이 있을 리가 없으니
아무래도 뭔가 이상했다. 내용을 확인해보니 그 또한 심상치 않다.
"이봐, 요즘 꼬시는 여자 있나?"
옆자리 후배에게 말하니 화들짝 놀라는 표정으로 대꾸한다.
"그거 어찌 아셨당가요?"
"........"
알고 모르고의 구분이 있을 리 만무한 메시지를
엉뚱한 사람에게 보내고 또한 그 사실을 알고 놀라는 모습을 보니
그 또한 가관이다.
아마도 잘못 보낸 것이 99.99%가 정확할 것으로 예상되는
그의 메시지는 이러했다.
<오천년전, 우리는 옷깃을 스친 인연이 있었나 봅니다>
아무리 여자 꼬시려는 말이라곤 하지만 그 내용이 몹시도 진부하며
표현 또한 무미건조하다. 젊은 사람들도 그런 표현을 쓰던가?
"이봐, 그렇게 해서도 여자가 넘어오나?"
"에이 모르시는 말씀, 그런 일에는 유행이 없어요.
멋진 말은 항상 통하지요"
변명같은 대답을 듣고 보니 나이도 한참 어린 친구가
말하는 투는 나보다 몇 살은 더 먹은 사람 같다.
하기야 아무리 세상이 급박하게 변하고 그 변화의 정도가
상전벽해에 비교된다 해도 변하지 않는 것들은 분명히 있다.
명작이라고 일컫는 그림들이 그러하고 명곡들이 그러하며 고전 또한
그렇지 아니한가.
그러니 남에게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하는 말이라도
좋은 표현은 시대가 변해도 통하게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오히려 요즘 자꾸 새로운 것과 첨단만 강조하고 따르려는
내 모습이 다소 처량하게 느껴진다.
쫓다 쫓다 언젠가는 못 쫓아갈 것이 분명함에도
어째서 참새가 황새 따라가듯 가랑이를 한껏 벌리려 하는가.
문명이 가져다준, 그리고 힘겹게 그 문명을 쫓는
무능한 이 땅의 30대 후반의 가장의 대표적인 모습인 것만 같다.
* * *
저녁 늦게 또 다른 일에 들어갔다.
내일 오후에는 시안을 제출해야 하는 일이라 밤에 서둘지 않으면
곤란할 듯 싶었다.
PC를 닦는 클리너에 대한 자료를 만드는데, 의뢰한 회사에서
제품을 멋들어지게 소개해 달라는 부탁도 아울러 떠올랐다.
화장품이나 자동차라면 모를까 PC 닦는 클리너를
멋들어지게 표현해달라니 이 또한 답답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하지만 시키면 시키는 대로하는 게 밥 먹는데 이롭다는 사실을
영악하게도 알고 있는 나는
잠시 담배를 피우며 이미 생각에 잠기고 있었다.
두 개피의 담배가 타 들어갈 무렵 문득 좋은 문구가 떠올랐다.
그리고 천천히, 그러나 매우 자신만만한 손길로
키보드의 글자들을 하나하나 쳐내려가기 시작했다.
<오천년전 PC가 있었다면, 반드시 클리너와 옷깃을 스쳤을 겁니다>
멋진 말은 언제나 통한다.
아하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