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직원 세 사람의 얘기다.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술이나 한잔하자는 동료 직원의 말에
술은 못 먹지만 그래도 가끔은 술자리에 참석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술집으로 향했다.
아직은 술자리가 거나하게 이루어질 시간은 아니었지만
동료 세 사람은 술집에 자연스러운 자세로 앉아 있었다.
남들은 한창 저녁 식사의 즐거움을 느끼고 있는 시간에 이 세 사람이 술집에서
자리를 함께 하게 된 데는 저마다 한 가지씩 고민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 고민은 귀가 시간을 의도적으로 늦어지도록 만들어야 하는 일이었으며
또한 저마다의 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한결같이 똑같은 것이었다.
“그러니까, 김형! 그래서 일찍 들어가면 안 된다는 거지?”
“그렇다니까. 박형도 그러면서 왜 남 얘기를 물어?”
“하긴 최형도 그렇다니 이거 원 참…….”
잠자코 앉아서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는 호기심과 아울러
무슨 재미있는 말들이 오가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이렇게 제안했다.
“그렇다면 누가 더 정도가 가장 심한지 한 번 내기해 봐?”
“내기? 그거 좋지.”
내 제안이 흥미로웠는지 아니면
내기라는 단어에서 불필요한 승부 근성이 발동했는지
저마다 자신 있다는 말투로
세 사람은 자기 사정을 줄줄이 늘어 놓기 시작했다.
세 사람이 집에 일찍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의외로 단순했다.
모두들 술 때문에 살고 있는 집 근처에서
한 번씩 커다란 망신을 당한 적이 있었기에
동네 사람들 보기가 창피한 나머지
날이 훤한 이른 시간에 집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는 같은 이유로 고민하고 있는 서로의 사정을 알게 되었고
결국 우둔하게도 누가 더 큰 망신을 당했는지 따져보게 된 것이다.
“제일 심하게 망신당했던 사람이 술 값을 내고 남은 두 사람이
2차를 화끈하게 사도록 하는 게 어때?”
내기에 참여해야 하는 당사자도 아닌 내 제안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고
너나 할 것 없이 담배를 하나씩 꺼내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난 승부에 관계없이 심사만 해도 되는 아주 편안한 내기여서
가끔은 술집에 오는 것도 즐거운 일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첫 번째 사람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얼마 전에 말이야……. 술을 한잔 했는데 그날 따라 어질어질하더라구.
그래서 겨우겨우 집에 찾아갔는데 우리 집이 아닌 거야.
그래서 이집 저집 다니면서 벨을 누르고 소리를 쳐댔지만
모두가 우리 집이 아니더라구.
동네는 맞는 것 같은데 도대체 집을 찾을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112에 전화했지.
동네는 맞는데 집을 못 찾겠다구. 잠시 후에 경찰차가 오고…….
난리가 났어.
몰려든 사람들 틈에 마누라 얼굴이 보이더라구.
그래서 집을 찾았다 싶어 그 자리에서 팍 엎어져 버렸지.
아침에 깨보니 마누라가 동네 사람 보기 민망해서 못 살겠다며
바가지를 잔뜩 긁고 있지 않겠어?
그 뒤로 나는 밤 늦은 시간 아니면 동네에 걸어다닐 수도 없게 된 거지.”
“허허~ 그거 심각한 일이군.”
나를 비롯해 듣고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네.”
술잔에 반쯤 남은 소주를 벌컥 들이켠 한 동료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도 비슷한 경우지. 근데 상황이 좀 다르구만.
알다시피 우리집은 아파트잖아.
택시 안에서 잠이 들었는데 내가 깨질 않으니까
택시 기사가 아파트 관리실에 집어던져 버리고 그냥 가버린 거야.
12시가 넘어서 술취한 사람이 아파트 관리실에서 인사불성이 되어 있으니
아파트 관리인도 대책이 없었던 모양이야.
몇 호에 사느냐고 물어보고 때려도 보고 꼬집어도 봤다는데
나는 도통 기억이 없어서…….”
“그래서?”
소주잔을 오가며 듣고 있던 사람들이 호기심에 가득 찬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다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관리실에서는 그 커다란 아파트 단지 전체에 방송을 했다는 거야.
지금 술취한 사람이 관리실에 누워 있으니 남편이 아직 안 들어온 집 부인들은
빨리 와서 확인들 하라고. 참 근데 말이지.
그 시간에 왜 이리 집에 들어오지 않은 남자들이 많은 거야?
나중에 얘기 들어보니까 엄청나게 많은 아줌마들이 왔다 갔다더구만.
심지어 구경하러 온 사람도 있었고, 어떤 남자는 남자끼리 의리도 없이
잠자는 마누라 깨워서 ‘저런 사람도 있으니 나는 점잖은 편이다’라고
외친 사람도 있었다는군.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우리 마누라가 그들 중에 좀 일찍 와서 데려갔으면
일은 간단히 해결되었는데, 방송을 늦게야 들었다나?
하필이면 거의 마지막에 오는 바람에
아파트 주민들한테 얼굴만 잔뜩 팔린 셈이 되었지.
그래서 날이 훤한 시간에는 집뿐 아니라
아파트 근처에도 갈 수가 없게 된 거지.”
“그것 참…….”
듣고 있던 일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마친 사람은 술잔에 반쯤 남은 소주를 스스로 마저 채운 뒤
홀짝 마시고는 잔을 누구에게 줄 것인가를 고민하는 듯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다시 아까의 그 자세로 자신의 잔을 채웠다.
“참, 마지막으로 자네는 어때?”
방금 긴 이야기를 끝낸 사람은 원래의 버릇대로 술잔의 술을 반쯤 마시더니
아직 얘기를 꺼내지 않은 다른 한사람에게 물었다.
“음……. 나는…….”
마지막 이야기 차례가 된 사람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네들이 각각 말한 두 경우가 나한테도 똑같이 있었지.”
그러자 갑자기 잔잔하던 분위기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표절이라는 얘기도 나오고 창의력이 없다는 얘기도 나오고,
내기라는 것을 잊었느냐는 질책도 나왔다.
감히 심사 위원인 내가 자리에 있는데도
흥분한 두 사람은 내게 자문도 구하지 않고 격렬하게 항의했다.
하지만 대꾸 없이 그들을 바라보던 마지막 사람은
이들의 항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고
심사 위원인 나는 결국 그 마지막 사람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사람이 말했다.
“하지만 내가 그 일을 겪은 게 아니라 우리 마누라가 그런 거라구!”
아하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