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러리맨의 낮은 아름답다

수정

아하누가 2024. 6. 26. 00:08


 

 

아침에 사무실에 도착하니 온통 산만하고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무슨 일인가 알아보려 하기도 전에 이미 부장님의 호출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봐, 김대리. 지금이 도대체 몇 년도야?

  이거 1988년은 도대체 언제 얘기야? 올림픽하나? 올림픽 해?”

 

 

무슨 일인가 알아보니 이번에 제작한 사무용 다이어리 한 부분에
연도가 1988이라고 잘못 인쇄된 채 완제품이 나오고 말았다.
엄밀히 따지면 내 잘못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책임자였던 만큼 달리 변명이나
책임을 회피할 수가 없었다.
없을 것만 같은 해결 방안을 이곳저곳으로 찾다가 잘못 인쇄된 부분을
지우개로 지우면 지워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실험해본 결과
비교적 흡족한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거 잘못되어 폐기 처분하면 퇴직금도 못 받고 쫓겨날 뻔했는데…….

 

다시 희망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는 또 기다리고 있었다. 한두 권도 아니고
몇 백, 몇 천 권도 아닌 몇 만 권을 어느 세월에 다 지운단 말인가?
시간이야 대충 조정하면 된다 치더라도

누가 이걸 하나하나 지우고 있을 것인가?
이 또한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매사가 늘 그렇듯이 죽으라는 일은 없었다.

그 상황에서도 나는 아르바이트라는 절묘한 생각을 해냈고

이는 곧 좋은 아이디어로 결재를 받아
당장 아르바이트 학생들을 모집하는 일에 착수했다.
많은 사람들이 뛰어난 나의 순발력에 찬사를 보냈고 이에 우쭐해진 나는
호탕하게 웃다가 부장님으로부터 원죄에 대한 또 한 번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하지만 일이 잘 되려고 그랬는지 직원 한 사람이 PC 통신에 광고를 내라는
아이디어를 주었고 나는 아주 흡족한 얼굴로 전산실에 있는,
통신을 잘 아는 평소에 친한 후배에게 이를 부탁하기로 했다.

 

 

“최형, 지금 디자인실에서 다이어리 수정 작업하고 있는 거 알지?
인원이 모자라서 그러니 빨리 PC통신에 아르바이트 모집 광고 좀 내 줘.
인원, 일당은 이 정도고 이틀 정도면 다 끝날 것 같아.
참, 오랜 시간 한 자리에서 꼼꼼하게 해야 하니 남자보단 여학생이 좋겠어.”

 

 

이틀이면 끝날 것 같은 일은 오히려 이틀이 지나도 아르바이트 문의 전화 한 통 없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당장 전산실 후배를 불러 닥달했지만
후배 직원은 오히려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분명히 알림란에다 광고했단 말이에요. 조회수도 200명이 넘어요.
근데 전화 한 통 안 왔단 말이에요?”
“그렇다니까…….”

 

 

내가 조금은 흥분된 말투로 답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후배 직원은 내가 보는 앞에서 PC 통신으로 연결한 컴퓨터 화면을 보여줬다.
PC 통신 화면을 처음 본 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서야 나는 왜 문의 전화가 없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는 빨리 PC 통신을 배우기로 마음 먹게 되었다.
후배 사원의 광고 문안은 이러 했다.

 

 

---------------------------------
아르바이트 - 수정할 사람 구함
---------------------------------

어렵지 않게 수정하는 일로 이틀 정도의 시간을 투자할 수 있는 여대생,
또는 수정을 원하는 일반 여성 누구나 환영.
하루 3만 원. 문의 2××- 61××

 

 

 

 

 

 

아하누가

 

 

 

'샐러리맨의 낮은 아름답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증거  (0) 2024.06.26
세 사람의 내기  (1) 2024.06.26
남직원회  (0) 2024.06.26
점심 식사  (0) 2024.06.26
빠구리  (0) 2024.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