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일하고 있던 부서에서 필요한 몇 가지 사무용품을 사기 위해
근무중 잠시 외출한 적이 있었다.
마침 경리부의 여직원 한 명과 동행하게 되었는데 그 여직원은 아직
상업고등학교를 채 졸업하지도 않은 신입 사원이었다.
이것저것 필요한 물품을 사고 다시 사무실로 들어갈 무렵
찌뿌드드하던 하늘에서 빗방울이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무데라도 비를 피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그 여직원이 난데 없는 한 마디를 던졌다.
“저~ 우리 어디 가서 빠구리치다 갈래요?”
“……!”
이런……. 끔찍한 일이…….
세상에 이런 일도 있단 말인가?
도대체 ‘빠구리’라는 이 무시무시한 단어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이 단어가 가지는 의미는 남녀의 진한 애정 행위를 묘사하는
아주 저급하기 그지 없는 상스런 은어 아닌가?
예전의 ‘콩까기’로 시작한 이러한 의미의 은어는 ‘떡치기’로 한 단계 발전했다가
급기야 어원도 알 수 없는 이 저질스런 ‘빠구리’로 일부 사회에서
아직도 통용되고 있는 단어다.
그런데 이러한 망칙한 단어가 여직원의 입에서,
그것도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어린 학생의 입에서 나오다니…….
그 단어가 튀어나온 사실만으로도 충격인데 그걸 하자고 하다니.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고 하지만 이렇게까지 변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순간 몹시도 당황한 나의 응답은 더욱 기가 막혔다.
“어디서 치지?”
말하고 나서도 이게 무슨 망발인가 막심한 후회를 하고 있는데
그 여직원은 아무런 감정의 변화도 없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아무데서나요.”
아무래도 이 정도 상황이면 심각하다.
어둠이 깔리고 술 한잔 거나하게 걸친 상황에
상대방이 멋진 남성이어도 나오기 힘든 말일 텐데
이 훤한 백주 대낮에 이게 무슨 망칙한 대화들인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여직원을 잘 설득해보려고 근처 커피숍으로 갔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 여직원은 오렌지주스를 시켜 놓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즐거운 표정이었고, 나 역시 달리 설명할 말도 없었고
또한 다시 그 ‘빠구리’라는 단어를 꺼내기도 민망스러워
그저 직장 생활이 이러저러하니 저러이러하라는 판에 박힌 사회의 경험을
얘기해 줄 수밖에 없었다.
여직원은 자기 계획대로 되지 않음이 섭섭했는지,
아니면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내 얘기를 듣는 둥 마는 둥 오렌지주스에 꽂힌 빨대만 만지작 거렸다.
비가 그쳤다. 지나가는 비였던 모양이다.
이렇게 그냥 지나가는 비처럼 세상의 이런 민망한 일들은
모두 다 지나가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사무실로 돌아왔다.
* * *
며칠 후, 나라의 부름을 받고 예비군 훈련에 참가하게 되었다.
한 동네에 오래 살다보니 예비군 훈련에 가면
초등학교 동창들을 오랜만에 반갑게 만난다.
그 친구들과 어울려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
요즘 젊은이들에 대한 화제가 있자
나는 최근에 있었던 ‘빠구리’사건을 친구들에게 설명하며
이 세상의 변화를 한탄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친구들도 내 얘기를 듣고 웃기도 하고
씁쓸한 표정을 짓기도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한 친구가 대뜸 물었다.
“그 아가씨 고향이 어디래?”
“그게 무슨 소리야?”
“고향이 어디냐고?”
“글쎄, 지방 먼 곳이라던데…….”
그리고 나서 그 친구의 말을 들으니 그 사건에 대한 모든 오해가 풀리게 되었다.
그 친구의 말인 즉 자신이 자란 지방에서 ‘빠구리’라는 단어는 그런 뜻이 아니고
흔히 우리가 수업 시간 또는 근무 시간에 일이나 공부 안 하고 살짝 빠져서 노는,
즉 ‘땡땡이’에 해당하는 단어라는 것이었다.
오해가 풀리면서 한편으로는 무척이나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빠구리치자’는 말이 나왔을 당시 그 여직원에게 그에 관한 말들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랬고,
또 하나는 우리 젊은이들이 보다 밝은 사고를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시간이 제법 흘러 그 여직원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정식으로 회사의 직원이 되었다.
그런 일이 기억에 남아 있어 늘 눈 여겨 보게 되지만
근무 시간에 땡땡이 치는 것을 단순한 재미로 여길 만큼 순진함을 잃지 않고 있다.
그런 만큼 일 또한 매사에 열심이라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보곤 한다.
아직 퇴근 시간이 까마득하게 멀게만 느껴지는 근무 시간.
어디 가서 ‘빠구리’라도 쳐야겠다.
아하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