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러리맨의 낮은 아름답다

은행

아하누가 2024. 6. 25. 23:59


 

샐러리맨 생활이야 늘 돈에 허덕이게 마련이지만
그래도 그날처럼 돈이 없었던 적은 없었다.
돈이 나올 만한 곳을 아무리 뒤져봐도

100원짜리 동전 하나 보이지 않았다.
정말 이럴 땐 1000원짜리 한 장이 아쉽다.
일단 무엇보다도 담배 한 갑은 사야겠고, 또 집에 갈 때

스포츠 신문이라도 하나 샀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평소의 사고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박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엔 지난 주에 사두었던 복권만 맞으면
태어나서 가장 멋진 폼으로 사표를 던지겠다는 뻔뻔한 생각 또한 그 틈에서도
잊지 않고 있었다.

 

 

약 1시간의 궁리 끝에 돈이 있을 만한 곳을 찾아 냈다.
그곳은 바로 월급이 나오는 통장으로 100원 단위의 돈이 모아져 있었다.
금액은 2000원이 조금 넘는 돈.

이 상황에서는 너무도 소중한 금액이 아닐 수 없었다.
몇 번이나 그것을 찾아냈다는 뛰어난 순발력에 스스로 감동하면서 뿌듯해 하던 중
문득 새로운 고민 하나가 떠올랐다.


그것은 과연 이 돈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으로,

은행 창구에 가서 달랑 2,000원을 찾겠다는 의지가 쓰인

청구서를 내민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 은행에는 평소에 눈여겨 보던 아가씨가
창구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곳이 아닌가?

 

 

겨우 찾아낸 2,000원을 이제 어떻게 손에 쥘 것인가 하는

또 한 번의 고민에 빠졌지만
순발력과 임기응변의 대가답게 나는 좋은 방법을 곧 찾아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일단 옆자리 동료에게 8000원을 빌린 다음

은행에 예금을 하고,
그리고는 현금 인출의 프라이버시가 비교적 보장되는 현금 카드로
다시 1만 원을 인출하는 것이다.

그러면 문제는 깔끔하게 해소될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는 신대륙 발견은 말할 것도 없고 전기 발명에도 버금가는
뛰어난 방법을 찾은 것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8000원을 은행에 입금시킨다는 것도

조금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1만 8000원을 빌려서 은행에 넣기로 했다.
아마 그 창구의 아가씨도 삐삐 요금이나 신문 대금 등 기타 요금을 내려는 줄 알 게다.

 

 

“이봐 김형! 1만 8000원 있으면 빌려줘. 10분 후에 줄게”
“왜? 2만 원이 아니구?”
“글쎄, 그럴 일이 있다니까…….”

 

 

굳이 2만 원을 빌려주겠다는 것을 애써 거부하고

경리부에 가서 잔돈까지 바꾸어가며 1만 8000원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발걸음도 가볍고 보무도 당당하게 은행에 가서
보기좋게 1만 8000원을 예금했다.
혹시라도 은행 여직원이 왜 1만 8000원만 예금하냐고 물어 볼까 봐
PC 통신 요금이라는 대답까지 준비하고 있었지만
아쉽게도 그 은행 직원은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상투적인 상냥한 웃음뿐이어서 괜한 쑥스러움마저 들게 했다.

 

잠시 후 현금인출기 앞에서 잠시 주변을 재빠르게 두리번거린 다음

신속한 동작으로 2만 원을 인출했다.

그리고는 혹시라도 남이 볼까 봐 돈과 함께 나온 지급명세서를
황급히 구겨서 옆에 있던 휴지통에 던져 버리고는

마치 영화에 나오는 은행 강도처럼 신속한 동작으로 은행을 빠져나왔다.
내 돈 2000원 찾기가 참으로 힘들다는 생각을 하면서.

 

하지만 발걸음은 몹시 가벼웠다.

일단 급한 불은 껐다는 안도와 또 계획했던 일이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는

성취감에 마치 월급이라도 받은 날처럼 기분은 들떠 있었다.

 

 

회사로 들어가기 전에 필요한 담배도 살 겸

다시 1만 8000원을 갚기 위해 잔돈도 바꿀겸
사무실 입구에 있는 작은 담배가게를 찾았다.

 

 

“아저씨! 담배 한 갑만 주세요!”

 

 

은행에서 황급히 주머니에 넣었던 돈을 꺼내며

유난히 힘이 잔뜩 들어간 큰 소리로 말했다.
담배를 주어야 하는 의무를 가졌으며

또한 어떤 담배를 찾느냐며 품목을 제시해야 할
서비스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담배 가게 아저씨는
담배를 주려는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

도무지 경제인구의 한 사람 답지 않은 표정으로
내 얼굴을 한참이나 빤히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우리 가게는 현금 지급 명세표 안 받는데요…….”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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