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러리맨의 낮은 아름답다

피를 나눈 사람들

아하누가 2024. 6. 25. 23:57


 

평소보다 조금 일찍 출근한 어느 날 아침,
일과에 들어가기 전 커피 한 잔 마시는 자리가 약간 소란스러웠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전산과에 근무하는 한 여직원의 오빠가 백혈병에 걸렸다는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모두들 이런저런 걱정 섞인 얘기로 안타까움을 주고 받다가 업무에 들어갔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오후 업무를 시작하려는데 회사의 공식 협조 요청이
전 부서에 내려왔다. 혈액형이 A형인 남자들의 도움을 바란다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내용이었다.
우선 A형인 사람들을 선별한 후 업무에 방해되지 않는 범위에서 몇몇 사람들이
먼저 병원으로 갔고 얼마 뒤 나를 포함한 6명이 2차로 병원을 가게 되었다.
병원에서는 피를 꽤 뽑았다.
그때까지 단 한 번도 헌혈을 해본 적이 없는 나에게는

참으로 새로운 경험이었는데…….

 

 

주사기로 약 대여섯 번 정도 반복하며 피를 뽑았는데 그것은 수혈이 아니라
수혈의 적절 여부를 확인하는 검사용이란 말이 나를 더욱 긴장시켰다.
일반 헌혈이나 수혈하고는 달리 혈소판 수혈을 해야 하므로

검사가 매우 중요하다는 병원 측의 설명이었다.
모두들 이름이 적힌 피를 한 모금(?)씩 쏟아 놓고 병원 입구에 다시 모이니
시간이 꽤 많이 지났다.

그 중 제일 후배 사원이 이렇게 모인 것도 인연이라며
회사로 가지 말고 술이나 한잔 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면서 그는 피를 나눈, 아니 앞으로 피를 나눌 사이가 아니냐는 묘한 논리로
모두의 동의를 구했다.
어차피 회사로 돌아가 다시 업무를 시작하기도 늦은 시간이었고
피를 나눈다는 표현에 모두들 적절함을 느꼈는지 단 한 사람의 이탈도 없이
그곳에 참여한 6명 모두가 한 술집에 자리잡게 되었다.

 

모두들 병고를 치루고 있는 동료 직원 형제의 건강을 걱정하다가

술이 몇 순배 돌아가니
그 걱정의 주 내용은 대부분 처음 받아보는 정확한 혈액 검사의 결과에 대한
각자 자신의 걱정거리로 변해 있었다.
모두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그 여섯 사람의 걱정은 제각각이었다.

여기서 잠깐 그 여섯 명의 심리 상태를 간략하게 그려보자.

 

 

K과장 : 평소에 술을 즐기는 이 양반은 자신의 몸 상태를 걱정하고 있었다.
이 사람의 고민은 ‘자신의 피가 피 반 술 반이 되어 있을까,
또 기타 위장이나 다른 신체적인 문제가 있지는 않을까’ 하는 일반적인 걱정이었다.
그는 그런 사실을 자신이 알게 될까 두려워
아직 한 번도 종합검진을 안 받았기에 이번 혈액 검사를 누구보다도 걱정하고 있다.

 

C대리 : 앞의 K과장보다 더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다.
얼마 전 무슨 일이 있었다는데 아마도 성병의 공포가 닥쳐 오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술을 마시면서도 ‘아닐 거야, 그럴 리 없지……. 확실히 씌웠는데……’를
앵무새처럼 계속 중얼거리고 있다.

 

Y과장 : 지금 회사에 근무하기 전의 직장에 있을 당시
3년간 해외 근무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무슨 이유로 고민이 되는지는 뻔한 일이고,
아마도 이 중에 가장 심각하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후배 사원 : 술 마시자고 제안한 그 후배 사원인데

그의 고민은 수혈과 병원 자체에 대한 무서움이었다.

전투 경찰로 복무한 걸로 보아 군대 생활도 제대로 한 모양인데
유난히 병원이라는 곳에 겁을 내고 있다.

 

L씨 : 나와 동료인 이 친구는 그리 큰 걱정은 없어 보인다.
단 한 가지 고민은 이번의 경우는 일반 헌혈하고는 달리

하루 업무를 제외시켜 준다든가
또는 빵과 우유, 그리고 열쇠고리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불만을 넘어선
약간의 정신병 증세를 드러내고 있을 뿐이었다.

 

나 역시 고민이 되는 이유가 있었지만 중요한 사안이 아니므로 생략.

 

 

모처럼 받아보는 신뢰 있는 혈액 검사여서 모두들 걱정을 한아름씩 안고서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느날,

병원으로부터 혈액 검사에 대한 결과가 회사로 통보되었다.
우리 일행보다 앞서 검사를 받은 직원들은 모두 ‘수혈에 하자 없음’이란
통보를 받았는데 우리 일행 중 단 한 명만 ‘수혈 불가’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 ‘수혈 불가’판정을 받은 사람은 과음으로 걱정하던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성병’이나 ‘AIDS’로 걱정하던 사람도 아닌
병원 자체를 두려워하던 후배 직원,

피를 나눌 사람이란 묘한 논리를 내세우며
술자리를 만들었던 바로 그 후배 직원이었다.

 

그 후배 직원은 통보를 받자마자 외근을 사유로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그를 제외하고 검사 결과는 모두들 만족할 만했다.
신체의 이상을 걱정하던 사람들은 완벽한 검사로 이상 유무가 확인되어
수혈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분위기였다.
피를 나눌 사람들은 오랜만에 유쾌한 얼굴로 담소를 나누다가

자연스럽게 화제와 시선은
유일하게 ‘수혈 불가’ 판정을 받은 그 후배 사원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얼마 뒤 이러저러한 몇 가지 과정을 통해 알게 된

그 ‘수혈 불가’의 충격적인
이유에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혈액형은 B형이었다.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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