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랬는지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어린시절엔 누룽지에 물을 잔뜩 넣고 끓인,
숭늉도 아니고 밥도 아닌 마치 죽처럼 생긴 밥을 자주 먹었다.
요즘이야 전기밥솥으로 밥을 하면 누룽지도 안나온다고 하던데 그래서 그런지
집에서 누룽지를 끓여서 먹은 기억이 전혀없다.
하지만 당시 쌀이 부족해서 생긴 이 가슴 아픈 현실을 전혀 알 리가 없는 어린 나와
더 어린 동생들은 그런 누룽지를 어른들의 생각과는 달리 불평은커녕
제법 맛있게 먹곤 했으며, 심지어 별식 삼아 가끔씩 밥솥 밑에 잔뜩 붙어 있는
누룽지를 보며 우리들끼리 물을 붓고 끓여 먹기도 했었다.
다만 그 모습을 보며 늘 가슴 아파하시던 분은 다름아닌 어머니셨는데
그것이 왜 가슴이 아파야 하는 일인지 어린 우리들로서는 알 길이 없었고
또한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날인가 어머니께서는 어디서 돈을 꾸셨는지 아니면
어디서 쌀 한가마니가 생겼는지 아주 맛깔스런 밥상을 차려주셨다.
밥 공기에 수북이 담긴 하얀 쌀밥이 낯설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그날따라 입맛이
누룽지가 더 당겼는지 동생들을 선동해서
메뉴를 누룽지로 바꿔달라는 주문을 당당히 했고
동생들도 이에 기꺼이 동조하고 나섰다.
그때 주로 외친 구호는 ‘우리에게 평소 먹던 음식을 달라’였고,
바로 밑 여동생은 적극 호응도를 띄며 동조에 나섰지만 아직 어린 막내 녀석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사태 파악에 열중하느라
그저 빈 숟가락만 빨고 있었다.
이렇게 일방적인 민심의 흐름으로 보아
곧 누룽지 요리가 준비될 거라는 예상으로 원하는 음식을 기대하고 있는데
어머니는 무언가 협상의 제안이 마음에 안드셨는지 해달라는 누룽지 요리에는
전혀 직무를 태만하신 채
밥을 푸라고 있는 주걱과 방을 청소하라는 용도로 나열되어 있는
빗자루로 나와 동생들을 쥐어 패기 시작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하여 매를 맞게 되니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일단 세력을 대표하는 대표자로서 강력한 항의의 의사를 표현해야 했고
그런 항의의 정도가 심해질수록 어머니의 구타의 강도 또한 높아졌으며
따라서 일단 무력진압에 의해 대세가 기울어지고 있다는 판단하에 항의를 중단하고
조금 덜 맞는 방향의 비굴한 작전으로 바꿀 수 밖에 없었다.
막내 녀석은 몇대 맞지도 않았는데 나보다 더 많이 울었고
왠지 모르게 전혀 울 이유라고는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던 어머님이 한쪽 구석에서
이해못할 눈물을 자꾸 흘리시고 계셨다.
쌀이 부족해서 늘 마음이 아프시다가 모처럼 맛나게 식사를 준비하신 어머님이
철없는 자식들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라는 것은 그 나이에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고,
다만 집단으로 항의를 한 것이 기분이 언짢으신 것이라는 생각만 들어
다음부터는 도움 안되는 동생들과 동맹하지 말고
독자적으로 세력을 키워야겠다는 사악한 생각만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고보니 벌써 25년도 훨씬 더 된 아주 옛날의 일이다.
* * *
요즘 매일 점심시간 마다 식사를 하는 식당에는
식사를 마치면 누룽지가 둥둥 떠있어 맛깔스럽게 보이는 숭늉을 준다.
그것도 1시 이후에 가야 나오는 음식이기 때문에
사무실 식사시간도 1시로 바뀌게 되었다.
오늘은 숭늉에 숟가락을 담는데 갑자기 새삼스럽게 예전의 그 일이 떠올랐다.
어머니의 마음 또한 십분 이해하고도 남지만
그 어린 나이의 내게 그런 성숙함을 기대하는 것도 조금 무리가 있지 않았나 싶다.
그러니 그것이 철없는 아이들만의 잘못은 아닐테고
그렇다고 어머님의 정성이 잘못된 것도 분명 아닐게다.
다만 그저 시대가 가져다주는 당연한 아픔이었던 것 같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절실하게 들면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주식 200주를 샀다.
혹시나 내 아들은, 그리고 우리의 후세들은 그런 기억을 만들지 않기 바라면서.
하지만 그것도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리 올바른 생각만은 아닌 것 같다.
그런 정도의 옛일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기에
당연히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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