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전해오는 우스운 얘기가 하나 있다.
학교가 아닌 서당이 우리나라의 모든 교육을 담당할 바로 그 시기의 얘기다.
어느날 훈장님이 낮잠에 빠졌다.
잠에서 깨어난 훈장님께 겁대가리 없는 제자 하나가
감히 야유에 가까운 항의를 했다.
그러자 훈장님 왈,
“나는 낮잠을 잔게 아니라 공자님을 만나고 왔느니라”
아무리 어린 학생이라지만 예나 지금이나 알 건 다 안다.
더욱이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던 그 시절에
그렇게 싸가지 없는 질문을 할 제자라면
발랑 까지다 못해 되바라져서
스승보다 훨씬 뛰어난 잔머리를 가진 학생이었을게다.
아니나 다를까. 그 다음날은 그 학생이 낮잠을 퍼질러 자다
훈장님께 호된 꾸지람을 듣게 되었는데 그 학생은 이렇게 변명했다나?
“공자님을 만나뵈니 어제 훈장님이 안오셨다는데요?”
그 뒤의 일이야 어찌되었는지 모르지만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변명을 하면서도
풍자와 해학을 잃지 않았던 것 같다.
* * *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엔 ‘교련’이라는 과목이 있었다.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군사교육이니 어쩌구 저쩌구 해서
사회적으로 꽤 많은 논란이 있었던 과목이다.
그런 교련 수업이 있는 날이면 교련복을 입고 가야 하는데
그 교련복이라는 게 잊기도 쉽고 시간표 챙기기도 쉽잖은 일이었다.
그래서 학급에서 꼭 몇명은 교련시간인데도 교련복을 못입고 있어
야단을 맞곤 했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는 당시 재미있는 교련선생님이 한분 계셨는데
이분은 교련복을 입고 오지 않은 학생들을 불러 늘 이렇게 물어보셨다.
“음... 왜 교련복을 안입고 왔는지 음.... 내가 깜빡 속아 넘어갈 수 있는
음.... 변명을 한번 해봐!”
질문도 질문이려니와 그 느릿느릿한 말투가
보통 우스운 일은 아니어서 오히려 수업보다
그 변명을 늘어놓는 시간이 더 중요한 시간이 되고 있었다.
그때 등장하는 변명도 가지각색이어서 학
생들의 성장 과정에 중요한 창의력을 당시 우리는
군사훈련 과목을 통해 키우곤 했었으니....
하지만 변명중 80%는 깜빡 잊고 왔다는,
조지 와싱턴 식의 솔직을 빙자한 파렴치한 변명이었고
나머지 변명은 대부분 ‘빨았는데 덜 말랐다, 잊어버렸다,
찢어져서 아직 못 꿰맸다’ 등
학생으로서만 가능한 순진무구한 변명일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같은 상황에서 한 친구가 그동안 볼 수 없었던
획기적인 변명을 했다.
“집에 도둑이 들었는데 교련복만 훔쳐 갔습니다”
하지만 말도 안되는 이 변명이 선생님 입장에선 무척 우스웠던지,
아니면 가소롭게 들리셨는지 ‘그 녀석 참...’하고 껄껄 웃으며
공식적으로 무죄를 선언했다.
그러자 그 뒤에서 변명 차례를 기다리던 또 다른 친구가 한 술 더떴다.
“어제 지진이 나는 바람에 집이 무너져서 교련복을 못챙겼습니다”
모두들 한바탕 웃었고
있지도 않은 지진 얘기를 꺼낸 그 친구도 당당한 자세로
마치 말 한마디로 학급에서 스타라도 된양,
있는 폼 없는 폼을 다잡고 서 있었지만
잠시후 그 친구는 교련 선생님께 시쳇말로 개패듯이 얻어맞게 되었다.
변명이란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나름대로 명분도 있고
또 변명에 어울리는 적당한 시기와 장소도 가릴 줄 알아야 하는 걸게다.
* * *
얼마전 청소년들의 성문제를 다룬 영화 한편이
한국공연예술진흥협의회(공진협)로부터
사상 처음 등급부여 보류결정을 받아 “예술표현의 자유”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이 영화는 결손가정에서 자란 두 여고졸업생이 가출하여
나이트클럽 등을 전전하며 사고를 저지르고,
유흥가를 방황하던 청년을 만나 스스럼없이 동침을 하고
이를 계기로 혼숙하면서 상습적인 혼음을 하다 살인까지 저지른다는 내용이다.
이 영화에 대해 공진협은 통념적인 섹스의 차원을 넘어서
두 여자와 한 남자가 엉켜 뒹구는 동물적인 혼음 장면이 문제가 되며
또한 정사장면의 과다표현, 혼음 장면의 구체성,
과도한 비인격적 표현 등 영화 주제 자체가
등급 보류를 결정하게 된 이유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에 대한 제작사측의 변명은 이렇다.
“이 영화는 섹스를 통한 이 시대의 절망과 허무를 담고 있다”
물론 이 영화를 아직 보진 못했고 개봉전이니 볼 수도 없다.
그리고 내가 영화에 대해 관계자만큼 알 수는 없다.
또한 심의를 하는 사람만큼 자세한 지식도 없다.
다만 너무도 진부하고 궁색한 그 변명만이 자꾸 기억에 남는다.
변명 치고는 너무도 설득력이 없지 않은가?
이제 앞으로 섹스를 통한 이 시대의 절망과 허무...등등의 구차한 변명은
그만 했으면 한다.
짜증난다.
이 시대의 절망과 허무를 찾는데 왜 청소년과 섹스가 소재로 등장해야 하는지......
차라리 요즘 같은 시대엔 섹스를 좀 더 리얼하게 그리고 싶었다는
뻔뻔한듯한 표현이 더 솔직한 변명 같다.
이제 청소년들이 섹스의 소구로,
그리고 어른들의 눈요기 거리로 쓰여지는 일은 삼가자.
아울러 변명할 일도 만들지 말자.
아하누가
이 영화는 노랑머리라는 영화였고, 저 글을 쓰고 제작참여자와 설전을 벌였었다.
결론은 내가 그 영화를 보고 다시 코멘트를 하겠다고 마무리지었다.
영화가 개봉되고 영화를 봤지만, 달리 코멘트를 달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저 관람객 한명 추가해줬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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