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

남자가 비겁해질 때

아하누가 2024. 6. 22. 23:57


------------------------------------------------------------
이 글은 어느 여성포탈사이트의 의뢰를 받아 쓰여진 글입니다.
------------------------------------------------------------

 

 


1.
친한 친구 몇놈이랑 술집에 갔다.
30대 중반의 한창 나이고

때는 바야흐로 주식시장이 뜨겁게 달아오르던 때였으니
당연히 좋은 술집에 갔다.

얼마나 좋은 술집이었는가 하면 푹신한 소파는 물론이고
헐벗은 여인들이 술도 따라주고 또 심심할까봐

노래도 불러주는 아주 좋은 집이었다.


그런 좋은 술집에 가려면 항상 걱정되는 일이 바로

술값이라는 경제적 부담인데,
그 또한 한 녀석이 자신이 ‘쏘겠다’며 호기를 빵빵하게 부리고 있었으니
이처럼 행복한 순간이 또 어디 있으랴.
분위기 좋겠다, 시설 좋겠다, 아가씨 이쁘겠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로
부지런히 퍼마시고 열심히 놀았다.
가끔 사회에서 소외되는 사람들이 생각나기도 했고 여기서 술 한병 값이면
아프리카 난민 몇백명의 한끼 식사가 될 것이라는

인류애 차원의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기분내서 한턱 쓰겠다는 친구 녀석의 심정을 생각해서라도

그런 생각은 억지로 잊으려 했고 즐거운 생각만 하기로 했다.

 

자리를 마치고 술값을 계산할 무렵이었다.
계산서에 적힌 술값은 무려 160만원. 넷이서 퍼질러 먹어댔으니
그 정도 금액은 각오하고 있었지만 막상 계산서가 나오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어차피 내 돈도 아니고 기분 내겠다는 녀석이 한번 쓰겠다니
그냥 그 녀석 기분 맞춰주는 의미에서 꾹 참고 있기로 했다.
하지만 잠시후 녀석의 신용카드를 받아간 웨이터는 난감한 표정으로
우리 일행이 있는 곳에 다시 들어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저... 손님, 사용할 수 있는 한도액이 50만원밖에 없는데요?”
“......?”

 

 

바로 이 순간,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자리에 앉아 있는 나머지 세 사람의 머릿속엔 수많은 생각들이 오갔다.

그때 오고 간 생각들을 차분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한턱 쓰겠다는 녀석의 카드 한도액은 50만원이다.
2. 계산해야 할 남은 술값은 110만원이다.
3. 여기서 나가려면 반드시 누군가 남은 술값을 내야 한다.
4. 남자들의 세계, 그것도 친구들끼리의 세계에서 나중에 다시 받는 일은 없다.
5. 갑자기 술이 깨는 것 같다
6. 어쩐지 처음부터 따라가기 싫었다

 

 

 

* * *

 

 

 

남자들은 자신이 쓰는 돈으로 얻는 또 하나의 가치, 즉 생색을 내는 일에
몹시도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남에게 한턱을 쓰겠다면 쓴 것 만큼의 기분을 누리고

또한 남들로부터 고마움을 인정받아야 한다.

그것이 인정되지 않고 남자들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가치가 인정되지 않는 지출이 이뤄지려 할 때 남자들은 비겁해진다.
아니, 차라리 비겁함을 택하게 된다.

 

 

 

2.
좁은 골목길에서 운전하고 있었다.
양쪽으로 주차된 자동차 사이를 예술적인 동작으로 헤쳐가며

거의 골목을 빠져나갈 즈음 반대편에서 차 한대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거리로 보나 상황으로 보나

내차보다는 상대편에서 차를 뒤로 물러서야 하는 경우였는데도
검정색 구형 그랜저에 앉아 있는 젊은 운전자는

계속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법으로 해결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이 상황은

전국의 모든 운전자들은 물론
운전면허 시험에 응시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당연히 나의 권리가 우선된 경우였으니
나 역시 당당한 자세로 계속 전진하고 있었다.
상대방의 차 또한 내 의지를 알았지만

절대로 뒤로 물러설 수 없다는 생각으로
계속 전진하고 있음을 느낄 즈음

뒷자리에 앉은 친구 한 녀석이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검정색 구형 그랜저에 젊은 사람이 운전하면 다 조폭이래”

 

 

그 말을 듣고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아니 앞도 안 쳐다보고 차를 후진하기 시작했다.
앞에 서 있는 검정색 구형 그랜저가 들어온 거리보다 무려 10배나 넘는 거리를
후진으로 운전하여 골목 진입로까지 차를 움직였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법이 가지는 비현실적 논리를 직시하고
또한 때로는 상황과 타협할 줄도 아는 것이 곧 현명함이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비겁’이라고 말했다.

 

 

 

3.
남자들은 여자와 가끔 싸움을 한다.

머리 끄덩이를 잡고 땅바닥에서 뒹굴거나
또는 주먹과 발차기가 오가는 싸움이 아니라

오기와 성깔을 가지고 싸움을 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런 싸움이라면 어떤 경우든,

어떤 상대든 남자는 여자를 이기지 못한다.
논리가 논리로써 해석이 되지 않고

가치관과 주관이 믿음으로 똘똘 뭉쳐있는 상황이어도
남자는 절대 여자를 이기지 못한다.
져주는 게 이기는 거라는 옛 어른의 말씀으로 합리적인 해석을 하려 해도
어째 속은 시원치 않다.

 


남자들은 가끔 이런 경우에 아주 통쾌하게 상대를 제압해보고 싶다.
오기는 오기대로 근성은 근성대로 그리고 더러운 성깔은 더러운 성깔대로
남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눈앞에서 확인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런 방법으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이 점점 확인되면서
남자들은 또 다른 방향의 해석을 하게 되고,
다른 방향으로 해석함에 있어서 또한 그 논리의 한계가 분명하게 드러나
남자들은 논리의 우위를 위해 또 하나의 다른 무기인 억지를 부리기도 한다.
논리를 논리로써 제압하고 싶은 남자들의 강한 욕망......
가끔, 아주 가끔 남자들은 비겁해지고 싶을 때가 있다.

 

 

김은태

 

 

------------------------------------------------------------------------------

PS. 홍기자님 안녕하세요. 크리스마스와 연말은 잘 보내시고 계신지요.
지난번 게재된 글은 잘 보았습니다. 다만 단락단락마다 제목을 달으셨는데
그게 좀 아쉬웠습니다. 제 글이 조금 정리가 안된 채로 보여지는 글이어서
제목을 요연하게 달아 두니 맛이 좀 떨어지는 것 같았거든요.
평범한 소재를 가지고 결론으로 귀결시키는 건데 제목이 달아지니 마치 주제를 풀어서
해설하는 것 같더라구요. 그거야 뭐 나름대로 편집 방향이 있으실테니 제 의견은
참조로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연말연시 잘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하누가

홍성희 기자 잘 지내시나? 정말 글 잘쓰는 기자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