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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어느 여성포탈사이트의 의뢰를 받아 쓰여진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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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창혁이라는 바둑 잘 두는 프로기사가 있다.
곱상한 외모의 이 프로기사는 외모와 전혀 상반되는
날카로운 공격력을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그 기풍이 화려하여
많은 팬을 가지고 있는 기사다.
개인적으로 유창혁의 고교 2년 선배이기도 하지만
졸업한 학교가 그렇다는 사실일 뿐이고
설령 지금 내가 불쑥 그 유명한 유창혁 기사를 만나
‘내가 네 고등학교 2년 선배다!’라고 반말을 한다면
이 또한 세상이 웃을 일이니, 선배라는 사실은
바둑을 둘 때 유창혁의 유명세를 등에 업고 상대방을 기죽이기 위한
심리적 전술 정도밖에 활용하지 못하는 졸업명부상의 선배일 뿐이다.
유창혁만으로도 허풍이 안통할 때면 이창호나 양재호의 이름도 들먹인다.
그런 유창혁이 바둑을 둘 때면,
또는 바둑 TV에서 유창혁 바둑을 해설할 때면 반드시 본다.
바둑이라는 것은 잘 짜여진 한편의 영화나 드라마와 같아
시시껄렁한 오락 프로그램을 보느니
좋아하는 유창혁 바둑을 보는 게 훨씬 더 유쾌한 일이다.
또한 남자들이 가지는 팬으로서의 의식은 여자들의 그것과는 달라
엄청난 의리를 가지고 스스로를 질책하며
팬으로서 가지는 충성심을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경향이 짙어 더욱 열심히 보게 된다.
2.
밤 늦도록 TV를 보다
더 이상 볼만한 프로그램이 없다고 생각되던 어느 날 새벽 2시경.
행복한 TV 시청을 향한 마지막 불꽃을 당기기 위해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마침 바둑 TV에서 유창혁이 대국하는
프로그램을 막 시작하고 있었다.
시간은 이미 새벽 두시를 넘기고 있었고 체
력적 한계는 바닥에 가까와지고 있었으며
따라서 잠의 유혹이라는 강렬한 욕구가 그 어느 때보다 동반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팬으로서의 의무도 있고 평소 좋아하는 유창혁이 바둑을 둔다는데
감히 잠을 잘 수는 없었다.
만약에 이런 순간에 잠을 잔다면
음란사이트 쫓아다니며 밤을 꼬박 새웠던 예전 일들이
한순간에 나의 본모습이 되고 말 것이라는 생각에
졸린 눈을 억지로 뜨고 TV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다가오는 졸음에는 장사가 없는 법.
잠의 유혹은 점점 강하게 다가오기 시작했고 바둑을 해설하는 해설자 목소리는
성악가 조수미보다 더 감미로운 자장가로 들리기 시작했으며
집안의 환경은 잠이 들기에 너무도 풍요로운 분위기를 제공해주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잠이 들 수는 없는 일.
눈물을 머금고 용기를 내어 자리를 박차도 일어나
욕실로 가서 찬물에 세수를 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방으로 돌아와 다시 자리를 잡고 TV를 보기 시작한지 5분후.
다시 졸음이 아까의 그 상황보다 더 강도 높게 쏟아지기 시작했으며
몇번이나 눈을 부릅뜨며 졸음을 참으려는 노력을 하던 끝에
비장한 각오로 욕실에 들어가 이번에는 찬물로 샤워를 했다.
몹시 괴로웠지만 바둑을 봐야 한다는 일념으로 참았다.
그리고 방에 들어와 다시 TV를 본지 5분후, 잠은 또 다시 아까의 그것보다
더욱 강도 높게 찾아왔고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고 판단되어
또 한번 자리에서 일어나 군대에서 잘 하던 쪼구려뛰기를 실시했다.
양손으로 귀를 잡고 제자리에서 개구리처럼 폴짝 뛰는
방정맞은 모습의 운동이지만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어 열심히 했다. 하나, 둘, 구령도 붙였다.
땀이 흠뻑 젖을 만큼 쪼구려 뛰기를 하니 잠이 훌쩍 달아나 버린 것 같았다.
그러나 3분뒤,
시간적 흐름에 따라 잠의 유혹에 대한 강도는 점점 높아만 갔고
쪼구려뛰기를 통해 이미 체력적으로 많은 소모가 있었던 터라
이번에는 몹시 견디기 힘든 강한 유혹이 찾아왔다.
하지만 지금 TV에는 평소 좋아한다고 말한 유창혁이 바둑을 두는데
감히 팬으로서
두다리 뻗고 방정맞게 잠을 잔다는 것은 자존심과 팬으로서의 자세,
그리고 대외적 신인도에 견주어 스스로 용납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본격적으로 잠을 쫓기 위해 조깅을 시작했다.
그 조깅은 조깅이라기 보다는 뜀박질 또는 달리기와 흡사했으며
잠을 깨고야 말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동네 한바퀴를 도는 방식이 아니라
제법 멀리까지 갔다 오는, 잠을 쫓기 위한 최강의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따라서 조깅은 마라톤이 되었고
이를 마치고 파김치가 되어 집으로 다시 들어오니
허무하게도 유창혁 바둑은 이미 끝났고 이름도 모르는 아마추어 바둑대회가
해설되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유창혁 바둑은 하나도 못봤다.
3.
흔히들 남자들을 가르켜 의리에 산다고 한다.
내가 어떤 사람의 팬으로서 그 사람은 나를 전혀 알지 못하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자신만의 기준에 따른 의리를 보이고 혼자 만족하곤 한다.
이 사실은 남자 특유의 순수함이기도 하며 또한 우직함이기도 하다.
가끔, 남자들은 눈앞의 일만 생각하며 단순해질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남자라는 이유만의 단순한 정신적 반응인지,
아니면 의리로 점철된 사고의 표현인지
그것은 여자들이 해석해줘야 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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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홍기자님.
지난번 글을 잘 보았습니다. 아직 사이트의 뚜렷한 색깔을 찾지 못하고 있으나
그것은 차츰 자리를 잡아갈 것으로 생각됩니다.
한가지 걱정되는 것은 홍기자님이 너무 많은 일을 하셔서 몇가지 일들이 간과되는 것이
아닌지 걱정되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또한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네요.
남자가 **할때 라는 코너가 없어진 건지 아니면 ‘너희가 남자를 아느냐’로
통합이 된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나름대로 정리를 하고 계시겠지요.
이글의 제목은 <남자가 단순해질 때>라는 제목으로 하셔도 됩니다.
만약 남자가 **할때라는 타이틀이 살아있다면 그렇게 해주시고 그렇지 않고
다른 타이틀 아래로 들어간다면 다른 제목으로 알아서 해주세요.
글의 대 주제는 남자들이 가지는 의리와 단순한 성격입니다.
자, 그럼 좋은 날 되시고 자세한 얘기는 전화로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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