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9월의 어느 날 동경의 이름 모를 거리를 걷고 있었다.
딱히 목적지도 없어 그냥 걸었지만 사실은 돈이 없어서 걸었다.
아니 돈이 없었다기 보다
술집에 들어가기엔 물가가 비싸서 그냥 걷기만 했다.
동남아에 갔을 때는 80m만 이동해도 택시를 타는 것을 당연히 알았는데
일본에 오니 택시는커녕 전철 떨어지기 전에
숙소로 돌아갈 일이 급하기만 했다.
연인과 데이트하는 것도 아닌데 무작정 걷기만 하니
그것도 지겨운 일이어서
같이 걷던 일행과 거리의 후미진 곳에 자리잡고 일단 주저 앉았다.
그리고 보니 자판기 한 대가 덩그러니 서 있는게 보인다.
"뭐라도 마시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일행을 뒤로 하고 얼른 자판기로 다가가
동전을 꾸역꾸역 집어 넣고 눈에 익은 코카콜라를 세게 눌렀다.
"넌?"
일행은 자판기에 전시된 이름모를 상표들은 유심히 보더니
어느 한 음료를 손으로 가리켰다.
겉에 보리 맥(麥)자가 선명하게 박인 음료였는데 값은 콜라값과 비슷했다.
캔 뚜껑을 따고 한 모금을 훌쩍 마신 동료는 마시기 무섭게 곧 뱉어냈다.
"왜 그래?”
발생된 상황이 우스워 물었더니
일행 왈, 맥주인줄 알았는데 그냥 보리차라나?
보리차를 음료자판기에서 돈내고 먹다니
세상 돌아가는 일이 참으로 우습기만 했다.
보리차를 우리가 돈을 주고 먹는다는 일은 생각도 안해보던 '공짜' 아닌가?
그때까지만 해도 보리차를 캔에 담아 돈받고 파는 것이 상술 좋은
일본사람의 발상으로만 알았다.
그래서 더욱 큰 소리로 웃었다. 깔깔깔깔.....
그렇게 웃어 넘기던 남의 일 같던 일이 오늘은 내게 현실로 다가왔다.
사무실 앞 편의점에서 마실 것은 찾는데 '하X보리'라는 상품이 보인다.
설마? 저것이 그냥 보리차? 에이 그래도 설탕이라도 섞었겠지.
궁금증에 선뜻 돈을 내고 사서 맛을 보니 불행히도 그냥 보리차가 맞다.
불과 4년 전만 해도 납득할 수 없는 상황들이 눈앞에서 펼쳐진다.
예전에, 아주 오래전에 봐두었던 공상과학 만화들도
이제 현실로 다가오려나?
그렇다면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나면 정말 공기도 통에 담아 팔게되고
20년 뒤에는 남녀 성비도 차이나서 짝이 없는 노총각이 더 늘어나게 된다.
입장료를 받고 풀밭에 들어가게 하는 사업이 번창할 것이고
바다에 가는 것도 시간적 제한을 받게 된다.
상황이 이런데 그런 세상이 오지말라는 법 없다.
800짜리 보리차 한병에
앞으로 있을 첨단기술로 만들어질 눈부신 장면도 상상해보고
또한 이에 그늘로 만들어지는 황폐화 되어가는 자연의 모습도 그려본다.
제발 내 생각이 맞지 않길 바라면서
오늘도 조심스레 우리의 후손이 살아갈 아름다운 모습을 그려본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일기는 이렇게 마무리되.......
면 얼마나 좋을까?
* * *
저렇게 글이 마무리되면 아주 감성적인 한편의 글이 되겠지만
사실 내가 오늘 느낀 것은 그것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감성적인 사람은 아닌가보다.
어쩌면 나라는 사람은 이상하게도 800짜리 보리차를 보는 순간
앞에서 주절주절 떠든 그 이야기들이
한순간에 빨리 돌아가는 영화필름처럼 휙 머리를 스쳐 지나갔을까?
보통 때의 경우보다 더 많은 문장들이 더 빠르게 머리를 스치운다.
보리차를 보면서 이렇고 저런 느낌을 가져야 정상임에도
나는 어쩌면 이렇게 저렇게 문장을 나열해서
일기를 써야한다는 생각을 했을까.
세상에 일기를 쓰기 위해서 태어난 놈도 있나?
아무리 봐도 그런 사람 없으니 큰일이다.
어쩌면 일기가 가져다주는 생각의 편린일 수도 있겠다.
내일은 한번 아무 생각없이 아무 글이나 써보자.
설마 이거 병은 아니겠지.
아하누가
2000년대 초반에 '일기나라'라는 곳에 쓴 일기인데, 일기나라의 방식은 현재 블로그의 효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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