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텅빈 운동장

아하누가 2024. 6. 20. 00:19


 

새 천년 첫 설날 연휴의 마지막 날 아침.
마침 일요일이어서 늘 하던대로 축구하러 집을 나섰다.
간밤에 눈이 너무 많이 온데다

명절기간이어서 상식적으로는 축구하러 가지 못함이
당연한데도 무리해서 집을 나선데는 이유가 있다.


연휴 2일간 하루 평균 20시간을 방바닥에 누워 있었더니

방바닥이 몸인지 몸이 방바닥인지 구분이 가지 않게 되어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혹시나 운동장을 찾았지만 예상했던대로 텅빈 운동장은
아무도 밟지 않은 설경을 뽐내며 나를 맞아주었다.
하긴 어느 미친 놈이 저렇게 많은 눈이 오는 것을 알면서

축구하러 나왔겠는가.
그래도 혹시나 같은 팀 동료들이 올 지 모른다는 희망 섞인 생각으로
눈사람을 만들기 시작했다.

잘 쌓여진 눈에 제법 습기마저 적당히 있어 눈사람은 잘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런 감성적인 생각은 잠시였고
시간이 지날수록 지금 내가 뭐하는 짓인지에 대한

자책의 비중은 높아만 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날 축구하러 나오겠다는 나는

분명 제 정신은 아니다.
얼른 눈사람 제작을 중단하고 가만히 하늘을 쳐다 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이 보다 더 한 적이 있었던 옛 일 하나가 떠올랐다.

 

 

              *       *       *

 

 

대충 3년전 여름인가?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느냐면 한총련이라는 단체가 시위를 했는데
이것이 정치권의 논리와 정략에 휘말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던 때였다.
학생들의 주장이나 정치권의 반응을 냉정히 판단해야 봐야 했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나는 그런 것은 차후의 문제고

한총련 학생들이 집결하여 시위를 하는 장소가
하필 내가 일요일마다 축구를 하는 곳이어서
내심 이번 일요일에 축구를 할 수 있을까만을 걱정하던 참이었다.

 

그날 저녁 뉴스를 보니 대충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는 것 같았고
내심 내일 아침에는 축구를 하는데

별 지장이 없겠다는 한가로운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음 날인 일요일 아침.
축구하러 운동장을 가려고 교차로에서 좌회전을 받는 순간

그만 깜짝 놀랐다.
이미 경찰 병력들이 도로를 바리케이트로 차단하여

일대의 통행을 차단하고 있었다.
도로에는 수많은 돌맹이들이 널려 있어 마치 공사장을 보는 것 같았다.
다행히 내가 늘 주차하는 학교 후문의 주택가로는

차를 들어갈 수 있게 하여
그곳까지는 비교적 어렵지 않게 갈 수 있었다.


그리고는 늘 일요일마다 하던 것처럼 가방을 매고

후문을 통해 학교 운동장으로 들어갔다.
그랬더니 이게 왠일.
아무도 없는 운동장은 이미 돌맹이 투성이로,

여기에선 축구는커녕 100미터 달리기도 힘든 실정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정면에 보이는 건물 옥상에는 학생들의 주장이 담겨진

많은 플래그카드들이 널려 있었고 아직도 옥상에는
몇명의 학생들이 그호를 외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주변 여기저기에는 약간의 연기도 피어오르고 있어
흡사 전쟁터의 비장함을 느끼기에 충분한 상황이었다.

 

 

이때였다.
운동장에 내가 모습을 드러내자

그때까진 보이지도 않았던 전투경장 한무더기가
어디선가 튀어 나오더니 나를 뺑 둘러섰다.
그러더니 그중에 고참인듯한 전경이 큰 소리로 말했다.

 

 

   “아저씨! 지금 어디 가시는 겁니까?”

 

 

참 환장할 일이었다.

복장으로 보면 운동하러 가거나 아니면 동네 목욕탕에 가야
어울리는 복장인데

감히 사회의 질서와 치안을 담당해야 하는 임무를 가진 전경치고는
참 딱한 질문이었다.

 

 

   “축구하러 왔는데....”

 

 

말꼬리를 약간 흐리며 반말인지 존대말인지 구분이 모호한 대답을 하니
전투경찰들을 몹시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잠시 말문을 잊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이 정도 상황에 당황하는 전경들이

어떻게 화염병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나

몹시 한심스러운 생각이 들었지만
전경 출신인 사무실 조부장님을 생각해서 애써 참기로 했다.


그때 마침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전기에서

그들의 지휘관인듯한 사람의 지시가 들려 왔고
가까이 있던 나 또한 그 말을 생생히 들을 수 있었다.

 

 

   “(지지지...독수리, 독수리) 야! 그 사람 뭐야?”

 

 

신경질적인 목소리의 주인공은 더 싸가지 없게 반말로 일관했다.
그러자 전경중 고참이 대답했다.

 

 

   “예! 축구하러 왔답니다!”

 

 

그말에 지휘관인듯한 사람도 몹시 당황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 지휘관마저 이러니 이 나라의 질서와 안전은 누가 지킬 것인가.


잠시 당황한 지휘관은

대충 소지품과 신분을 조사하고 보내라는 지시를 내렸다.
지시를 받은 전경들중 이번엔 신참인듯한 한 전경이

비교적 상냥하게 말했다.

 

 “저~ 지금 우리 소대장님이 저 위에서 보고 계시거든요?
그러니 대충 형식적으로나마 가방 좀 열어주시겠어요?”

 

 

이번엔 아주 맘에 드는 모습이다.
저러니 자꾸 새로운 신인이 등장해야 하고 젊은 피가 수혈되어야 한다.
그렇게 나오는데 나도 딱히 거부할 이유가 없어서 순순히 가방을 열어줬다.
하지만 축구하러 온 사람 가방에 뭐 볼 게 있나.

가방안의 내용물은 축구화, 정강이 보호하는 보호대,

그리고 여분으로 준비한 유니폼 등이었다.
대충 뒤적이던 고참 전경은

아까보다 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으.... 이 아저씨.... 지....지... 진짜 축구하러 왔어....”

 

 

              *       *       *

 

 

지난 옛 일을 가만히 생각해보니

미친 놈 소리를 들을 정도로 열성을 가지고 하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굳이 내가 그러지 않더라도 가끔 주변 상황도 의식하지 않고
주책없이 또는 철딱서니 없이 헛소리를 하는 것 같은 경우도 보게 되지만
그래도 생각해보면 그야 말로 아름다운 모습인 것 같다.
아무래도 밝아 온 새 천년에는 무언가에 그렇게 미쳐봐야겠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말이다.

 

 

 

 

 

아하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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