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추위가 싫은 남자

아하누가 2024. 6. 20. 00:16


    
     사람마다 체질적인 특징이 있게 마련이다.
     굳이 사상의학이라던가 또는 다른 의학적 부연 설명을
     곁들이지 않더라도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다는 것은 모두 다 아는 얘기다.
     이렇게 모두가 아는 얘기를 거창하게 서두에 끄집어 낸 것은
     유난히 주위를 싫어하는 나의 체질적 특징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나는 추위를 몹시 탄다.
     이 세상에서 가장 싫은 게 무엇이냐고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단호한 목소리로 '추위'라고 한다.
     그렇다.
     추위는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다.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추위를 얼마나 타기에 이렇듯 오도방정을 떨고 있는지
     그간의 행적을 더듬어 보자.
     글의 특징에 어울리게 일기 형식으로 정리해본다.    
          
     
   1986년 8월 X일

     새벽 3시 보초 근무를 나가려고 내복을 입다 고참에게
     잔소리를 들었다. 산속이라 한여름에도 춥다는 걸 자신도 잘 알텐데
     왜 나한데 잔소리하고 지랄인지 모르겠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 보초 근무를 준비중인 쫄따구들을
     세워 놓고 물었다.

 

     "야, 니네 안춥냐? 한여름에도 산속은 추워,  니네도 내복입고 올라가지?"

 

     쫄따구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추위를 정신력으로 이기려는 무서운 놈들이다.

 

 


     1994년 1월 14일

     드디어 차를 뽑았다. 나이 서른 한 살에 내 차가 생기다니
     정말 꿈만 같다. 차를 왜 샀냐고?
     차를 왜 샀는지 중요한 이유를 비율로 표시해주마.

 

 

 

     - '야타' 하려고. --------(1%) 프라이드로 야타하는 놈 봤냐?
     - 지하철비 아끼려고 -----(0%) 보기도 보기같은 걸 들도록 하자
     - 마누라 태우고 놀러가려고 --(3%) 놀러가긴, 심부름 가게 되겠지
     - 마이카족에 합류하려고 -----(1%) 그게 뭐 대단한 족이더냐?
     - 단지 춥다는 이유로 -------(95%) 설명이 필요없음

 

 

     이제 추운 날 지하철까지 걸어가지 않아도 된다.
     마을버스를 타려고 길가에 고개를 잔뜩 움츠리고 서있지 않아도 된다.
    
    
     겨울을 따듯하게 보낼 수 있는 자동차를 살 수 있게 도와준
     미국의 포드할아버지와 한국의 정주영 할아버지,
     그리고 도로를 많이 만들었다는 박정희 할아버지께 감사 드린다.
     차안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앞으로 도와줄
     인순이 언니께도 감사한다.

     


     1998년 1월 XX일

     사무실을 시내로 옮기고 나니 비싼 주차료와
     열악한 주차 사정 때문에 차를 가지고 다닐 수가 없다. 좆됐다.
     대신 오늘도 후보 농구선수들이 입는 벤치파커를 샀다.
     거의 무릎까지 내려오는 사이즈다. 벌써 4벌째다.
     아내는 왜 그런 옷만 잔뜩 사오냐고 잔소리한다.
     아내는 몰라서 그런다. 이게 얼마나 따뜻한데.
     오줌 쌀 때가 조금 불편하지만 그래도 추운 것 보다 낫다.

     하지만 겨울은 언제나 춥다. 옆구리가 허전해? 천만의 말씀.
     옆구리가 허전하다는 놈은 추운 걸 모르는 놈이다.
     어깨가 시려야 진짜 추운 것을 아는 놈이다.

 


     2000년 6월 7일

     어제는 현충일이었는데 혼자 사무실에 나와 일했다.
     사람이 없으니 분위기도 스산하고 썰렁했다.
     역시 일은 사람 많은 곳에서 활기를 느끼며 해야 한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은 일을 할 분위기가 아니니 일도 잘 되지 않는다.
     그러니 휴일에도 나와 일하는 것이 보람이 없어진다.
     그렇듯 휴일에도 나와서 일하는데 동료들은 계속 내게 핀잔을 준다.
     공휴일에 나와서 일하는 것도 죄인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누군가의 말씀처럼
     어제 내가 혼자 사무실에 나와 일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으려 한다.    
     그런데도 주변에서 나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계속 어제 사무실에 나와 일한 사람을 찾고 있다.

     지금도 누군가 어제 일한 바로 그 사람을 찾으며 돌아다니고 있다.
     그 사람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온다.   
    
    
     "도대체 누가 전기난로 꺼내서 켠 거야?"     
   

 

                           *****************

 


     2001년 8월의 어느 날.
     나는 아침 일찍 거래처에 볼일이 있어 다녀왔다.
     비교적 부지런히 움직인 덕에 이른 시간에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고
     덕분에 다른 직원이 사무실 자동차를 타고
     다른 거래처로 향할 수 있었다.
     아직 휴가를 떠난 사람들이 많은 이유인지 비교적 시내는 한산했다. 
     


     저녁이 되어 퇴근할 무렵 거래처에 갔던 직원이 돌아왔다.
     무슨 고생을 그렇게 많이 했는지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마치 월남전에 다녀온 맹호부대 병사처럼 다급하게 말을 꺼냈다.     
    
    
     "우와~ 나 아까 차안에서 죽을 뻔했어.
       글쎄 에어컨 켰더니 히터가 나오는 거야..."

 

 

 

 

 

 

 

 

아하누가

아직도 추운 걸 싫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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